[최원희 기자]
“나는 내 꿈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만약 당신이 운이 좋아 꿈에서 쓸만한 어떤 것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완벽한 원본이다. 그 원본은 현실 세계에는 없고 당신의 머릿 속에만 있는 것이니까.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인 것 같다”
꿈을 현실로 만드는 리 알렉산더 맥퀸은 하늘이 데려간 천재 디자이너로 불리운다. 그의 디자인에는 낭만이 살아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 숨 쉰다.
데뷔 전부터 남다른 행보로 패션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디자인은 컬렉션 데뷔 무대부터 근 15년 동안 패션계를 ‘맥퀸 스타일’로 물들였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버린 디자인은 충격적이고, 예술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패션에서 쇼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쇼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1969년 런던 근교에서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리 알렉산더 맥퀸은 3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초등학생 때 패션 디자이너로 미래를 정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 신문기사를 본 어머니의 권유로 이탈리아 최고급 맞춤 양복점의 본산인 새빌 로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코트 전문 테일러숍에서 견습생 일을 시작했다.
후에 앤더슨 앤드 쉐퍼드로 옮겨 고급 테일러링의 기술을 습득한 그는 레미제라블 의상 제작에 참여하며 19세기 의상에 대한 기본기를 익혔다.
1994년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에술대학의 패턴 튜터 자리에 지원했지만 학교 측의 권유로 석사과정을 등록하고, 보그 에디터 이사벨라 블로우의 눈에 띈다.
이사벨라 블로우는 맥퀸의 행보에 있어 비공식 PR스타일리스트로 고용 및 알렉산더로 활동, 작품의 구입 등 열렬한 서포터이자 고객으로 남았다.
“나는 특히 변태적인 면이 있는 액세서리를 좋아한다”1996년, 27세가 되던 해 4년간 지방시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진 그는 2001년 파리 무대에서 본격적인 데뷔를 하며 파격적인 행보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그의 의상은 보는 이들을 꿈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고 패션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2010년,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패션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생각은 그것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사망 이후 그의 빈 자리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 시절부터 어시스트로 함께 지내온 사라 버튼이 대신했다.
패션 산업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던 브랜드 가치를 지켜낼 디자이너는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천재적인 감성에 더해진 우아함은 그에 대한 의문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단 몇 번의 컬렉션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지켜내고 있음을 인정받고 있는 그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되자마자 영국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톤의 웨딩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미쉘 오바마의 공식 만찬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등 세계 유명 인사로부터 인정 받으며 자신만의 색을 펼쳐내고 있다.
(사진출처: 알렉산더 맥퀸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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