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희 기자] “쿠틔리에는 설계에 있어서 건축가여야 하고 형태에 있어서는 조각가여야 하며 색채에서는 화가, 조화에서는 음악가 그리고 절제에 있어서는 철학자여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 파리 오트 쿠틔르를 황금시대를 이끈 디자이너로 유명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우아함과 기품을 갖춘 완벽함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대중적 명성보다는 쿠틔리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간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앙드레 꾸레쥬, 엠마누엘 웅가로, 위베르 드 지방시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추앙을 받으며 파리 모드계의 교황으로 불리우는 그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발렌시아가는 구상, 재단, 봉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상 제작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쿠틔리에다”_가브리엘 샤넬
1895년 스페인의 어촌에서 태어나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옷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12세가 되던 해 카사 토레 후작 부인의 후원으로 패션계에 입문했다.
뛰어난 능력으로 2년 만에 여성복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이 된 그는 파리의 화려한 패션 산업을 접하게 되면서 쿠틔리에가 되기로 결심하고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띠크를 오픈하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컬렉션을 열며 스페인 내에서 입지를 굳혀나가지만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쿠틔르의 무대를 파리로 옮기는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만의 고급스러운 소재, 재단, 봉제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우아한 기품은 파리 패션계의 눈을 속일 수 없었고 첫 파리 컬렉션을 주최하자마자 대성공을 거두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러플은 반드시 지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복식사의 역사상 가장 화려하면서도 새로운 패션들이 꿈틀거렸던 1950년대를 떠올리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가 있다.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오트 쿠튀르의 황금 시대로 불리는 이 시대에 1940년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허리 라인이 강조된 ‘뉴룩’에 반하는 허리선이 불룩한 ‘코쿤라인’을 선보이며 자신만의 트렌드를 개척해간 발렌시아가는 후에도 샤넬의 ‘No.5’를 위협하는 ‘르딕스’, 힙 라인까지 내려오는 루즈한 라인의 튜닉 드레스 등으로 패션계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의 디자인이 많은 이들에게 추앙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발렌시아가의 옷에는 항상 우아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풍성한 실루엣의 라인에서 심플하면서도 매끄러운 라인으로 완벽한 테일러링 기술로 독창적 디자인을 선보인 그는 1968년 은퇴 전까지 우아한 정교함을 펼쳐내며 파리 최고의 쿠틔르 하우스로서 명성을 누렸다.
“옷은 여성의 몸을 완벽하게 만들어준다”
발렌시아가의 완벽한 의상을 제작하려는 열정은 신체의 활동성에 따른 실용성과 함께 정교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데에 집중됐다.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선에 합격되지 않은 옷들은 부띠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물론, 프랑스 승무원의 유니폼을 제작할 당시에도 3000명이 되는 승무원들을 모두 피팅하기를 원했던 완벽주의자였던 것.
옷이 여성의 몸을 완벽하게 만들어준다는 신념으로 몸에 대한 결점을 보안하려 노력했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자신만의 고집 있는 신념으로 래글런, 기모노, 배트 윙, 벌룬 등 다양한 소매 디자인을 남기며 클래식한 디자인의 기초적 틀을 마련한 그는 현재에도 많은 디자이너들의 추앙을 받으며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사진출처: 발렌시아가 공식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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