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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윗길을 가다(36) 설악산 석황사골 ‘몽유도원도’ / 아름다운 시인 김기섭, 그가 남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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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기자 / 사진캡션 김기섭]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선시대의 화가 안견의 작품명이다. 안견은 조선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손꼽힌다.

안평대군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꿈속의 풍경은 그야말로 도원경, 즉 천국과 같았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이야기를 안견에게 털어놓았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아들로 외모가 준수하고 글도 명필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친구지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안견은 치밀하게 그림을 구상하여 거침없이 이틀 만에 대작을 완성하였다. 안견은 그림의 왼쪽부터 현실세계, 도원의 입구, 중간경치, 도원선경 네 부분으로 나누어 빼어난 산수화를 완성한다. 그림에는 기암절벽과 고봉준령이 어울리고 청류가 흐르는 절경이 살아 움직인다.

당대의 권력실세인 안평대군이 기획을 하고 동시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린 산수화에는 결국 당시 조선팔도를 쥐락펴락했던 문인과 학자, 관료들의 자필 발문이 실린다. 박팽년, 성삼문, 김종서, 서거정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정작 그림이 완성된 후 안평대군은 절친한 안견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워 자신의 곁에서 떠나도록 한다. 안평대군은 왜 안견을 내쳤으며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찌되었을까?

역사와 운명이 극단적으로 어우러져있는 산수화 '몽유도원도'의 원본은 안타깝게 일본에 머무르고 있지만 우리는 몽유도원도를 두 발로 딛고 서서 평면이 아니라 입체감이 살아 넘치는 현실에서 만날 수 있으니 그곳은 바로 설악산 석황사골의 몽유도원도 릿지에서다.

내설악 석황사골 어느 한적한 능선에 감히 조선시대 최고의 산수화인 '몽유도원도'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또 누구이며 또한 그 바윗길은 어떻게 생겼을까? 벌써 오래 전부터 궁금했고 꼭 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건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벼르던 몽유도원도를 등반하겠다고 하루 전날 밤 한계령 인근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는데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내일 설악산의 날씨도 개인다고 하는데 예감이 썩 좋지만은 않다. 이렇게 안개비가 계속 내려 등반은커녕 내리는 비를 안주삼아 하루 종일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때웠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젖을 듯 말듯 아주 작은 포말로 부수어져 흩뿌리는 안개비는 고적한 설악산의 운치를 살려내기에 충분했다. 일행이 미리 준비한 오삼불고기를 안주삼아 이틀간 마실 요량으로 준비한 1.8리터 들이 페트병 소주 두 병을 모두 쓰러뜨린 후에야 슬리핑 백에 몸을 뉘었다.


몽유도원도는 워낙 인기 있는 릿지길이어서 분명 등반자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 새벽 5시도 안된 시간에 일어나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는 부산을 떨어보는데 밥을 다 먹고 세면까지 했는데도 정작 안개비는 그칠 줄 모른다. 결국 10시경이 다되어서야 안개비가 걷히고 멀리 하늘이 바라다 보인다. 지체 없이 차를 타고 장수대 주변 미륵장군봉 '입산금지' 표지에 선다. 여기에서 입산금지란 물론 미리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등반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더러 진입로 초입에서 공단직원이 나와 등반허가서를 확인한 연후에야 통행을 허가하고 있으니 불필요한 입씨름과 다른 사람 이름을 파는 일 없이 미륵장군봉을 등반하고 싶다면 서면으로 미리 등반신청을 해놓을 일이다.

7개의 붉고 작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는 몽유도원도 릿지는 1992년 하이얀산악회에서 초등하고 2002년 경원대 산악부의 김기섭, 김동진과 이계숙씨 등에 의해 재개척되었다고들 말한다. 몽유도원도 길은 내설악 안산과 대승령 사이에 숨어 있는 수려하고 주변 경관이 멋진 바윗길이다. 능선으로 된 바윗길이어서 좌우로 펼쳐지는 전망이 뛰어나다. 그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펼쳐두고 등반을 하게 되니 몽유도원도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출입금지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비교적 깨끗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릿지길의 접근로로는 양호한 편이다. 계곡에서 바로 물을 떠서 한 잔을 마시고 수통에도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석황사 터를 지나고 쓰러진 소나무를 넘어 신선벽 가는 길이 아닌 왼쪽길로 접어들면 어느새 등산로가 사라지고 볼트도 보이지 않는 능선이 나타난다. 도로에서 첫째 마디까지 가는 접근로는 채 2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곳이 첫째 마디인지 헤매는데 그도그럴것이 첫째 마디는 걸어가는 구간이다. 선등자들이 '걸어가는 구간'이라고 하면 후등자들은 대개 그 말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몽유도원도 첫째 마디는 걸어가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편안한 바윗길이다. 볼트에 슬링이 걸린 바위가 첫째 마디다. 이곳을 넘어서서 걸어가면 되고 약 5미터의 슬랩을 지나 다시 약 50미터 정도 진행하면 하강 포인트가 나오는데 여기서 15미터 정도를 하강한다. 난이도 5.5. 

둘째 마디는 슬랩에서 볼트를 통과하여 다시 15미터를 전진한 후 약 5미터의 직벽 구간을 하강한다. 거리 10미터의 짧은 구간이며 사실 몽유도원도의 난이도는 넷째 마디와 제일 마지막 구간의 선등이 부담이 있을 뿐 전반적으로 높지 않아 낙석에 대비하고 하강시의 안전에 신경 쓴다면 여유롭게 등반할 수 있는 바윗길이다.

셋째 마디에서 이름 없는 첫 번째 봉우리를 넘는다. 출발지점은 벽을 바라보게 되어있어 다소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첫 번째 볼트에 퀵드로우를 걸고 넘어서면 홀드가 좋다. 셋째 마디 끝나는 부분 오른쪽 벽에 쌍볼트가 있어 우리 일행도 그쪽으로 등반하려고 가보았는데 난이도가 무척 높아 보인다. 사전에 확인한 개념도와는 차이가 있어 잘 살펴보니 오른쪽 길은 신선벽에서 출발한 바윗길이다. 뒤로 돌아서 원래의 릿지길을 찾아간다.

넷째 마디는 몽유도원도에서는 비교적 어려운 난이도인 5.7, 거리 25미터의 크랙구간이다. 쌍크랙 형태로 오버행으로 보여서 다소 위압감을 주는 모습이다. 초보자가 어려워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넷째 마디가 끝나면 네 번째 봉우리를 넘게 된다. 그리고 소나무에서 다시 다섯째 마디가 시작된다.

몽유도원도 릿지는 오른쪽으로 미륵장군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도 봉우리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를 현실세계에 펼쳐놓은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그 산수화 속에 등반하는 모습이 꿈 속의 천국에서 노는 모습과 같아 보여서 몽유도원도라 칭한 것일까?

다시 소나무를 출발하여 다섯 번째 봉우리를 넘는 다섯째 마디. 이곳에서 약 15미터의 직벽크랙이 나타난다. 등반이 끝나면 역시 소나무에 확보를 한다. 거리는 20미터로 다섯째 마디가 끝나면 왼쪽으로 첫 번째 탈출로가 나온다.

여섯째 마디에서는 봉우리 쌍볼트에 자일을 걸고 약 10미터 정도를 하강한다. 이 구간에 전망이 좋은 곳이 나온다. 일곱째 마디에서는 계단식의 짧은 오버행이 두개 나타난다. 몽유도원도 릿지에서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이며 위압감을 주는 구간이다. 평이한 오버행 바위를 넘어 왼쪽 바위로 올라 선 다음 크랙에 프렌드를 하나 설치하고 왼쪽으로 올라붙어 오른쪽 크랙의 홀드를 잘 살펴 오르면 곧 확실한 홀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홀드를 잡으면 몽유도원도의 등반은 거의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여덟째 마디는 약 25미터를 걸어가듯 이동하면 석황사골로 하산하는 길이 나타난다. 몽유도원도 릿지 등반은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하산길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안전제일' 표시가 선명한 슬링줄이 계속 이어져 있다. 누구의 배려인지 모르지만 안전하게 하산을 하라는 의미가 담긴 로프를 설치한 분께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몽유도원도길. 과연 누가 왜, 어떤 의도를 갖고 개척한 길일까?

몽유도원도의 개척자는 앞에 말했듯 김기섭 씨다. 기자는 그의 블로그(http://blog.daum.net/san62)를 통해 연락을 하고 7월11일,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모 요양병원에서 장기입원하고 있는 김기섭 씨와 통화할 수 있었다.

-요즘 건강은 어떤가?
“항상 좋은 편이죠. 하하. 제 성격이 긍정적인 면도 있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편이죠 뭐”

-몽유도원도 길을 개척하게 된 동기는?
“석황사골 우벽 미륵장군봉에 코락길과 타이탄길이 있죠. 그 가운데 '체 게바라길'도 제가 개척했는데 그 길을 개척하는 도중에 몽유도원도 라인이 보였습니다. 능선상의 바위가 발달해야 바윗길이 완성되는데 부분적으로는 미약해 보여서 조금 주저했죠”

-‘몽유도원도’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개척기간중 이 길을 가는데 안개가 낀 좌우의 벽들과 주변경치가 참 좋았습니다. 몽유도원도 그림을 보면 바위도 많고 사람들이 한가하게 거니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니까 이 릿지에서 등반하는 사람들이 여유를 갖고 멋진 경치를 즐겨보라는 의미에서 몽유도원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죠”

김기섭 씨는 울산암 요반길도 개척했는데 요반구락부 후배였던 이계숙 씨와 코락길 하단을 등반한 후 오른쪽 꿀루와르를 통해 올라가 벽 정상에 섰다. 식사후 날씨가 급변하면서 바로 50미터 앞에서 번개가 내리 꽂히는 바람에 그야말로 죽다 살아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술자리에서 미륵장군봉에 가장 쉬운길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해서 '체 게바라길'도 개척하게 되었다고 한다.

- 몽유도원도 길 개척 당시에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개척기간이 오래 걸렸죠. 직장이 서로 다르다보니까 서로의 스케줄을 맞추기 힘들었어요. 그후 이계숙 씨가 포항으로 가면서 길을 혼자 개척하다시피 했죠. 당시 석황사골은 사람들이 거의 접근을 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혼자 석황사 터에 텐트를 치고 솔로로 등반한 경우도 있어 다소 위험하게 길을 냈죠. 나중에 학교 산악부 후배 김동진이 합류해서 개척작업을 마무리 했습니다”


- 하이얀산악회에서 이미 이 길을 초등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몽유도원도는 2001년 개척이 완료됐습니다. 그후 2005년 겨울 코오롱등산학교에서 <즐거운 암릉길>이라는 책을 만들 적에 이용대 교장선생님이 지적해 주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하이얀산악회는 ‘코등 ’출신들이 주축이 된 산악회였거든요. 그런데 길을 개척하다보면 “길이 살아있나 아니면 죽어있나”를 살피게 되는데 당시에 이곳에는 잡목이 많이 우거져서 그것을 치우고 가는데 팔이 아플 정도였죠. 도저히 다니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당시에 볼트가 딱 한 개 박혀있어서 저는 그것이 길을 위한 볼트가 아니라 개척하다 만 경우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 하산길이 어려운 편인데 개척 당시에는 그 점에 대해 고려했는지?
“개척 당시에도 내려가기 쉬운 길을 찾기 위해서 반대편 계곡으로도 내려가 봤죠. 길은 오히려 그쪽이 더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석황사골 계곡이 너무 아름다웠고 힘이 들더라도 등반을 마친 사람들이 그 계곡을 즐기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석황사로 이어지는 하산로를 선택했습니다”

김기섭 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15개(올해 5월 영월 서강에 강변리지 '봄날은 간다' 개척) 의 바윗길과 암릉길을 개척하여 산악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한 산악인이다. 그가 개척한 길들을 살펴보면 백운대의 ‘시인 김동엽길’(1993), ‘녹두장군길’(1994), ‘김개남장군길’(1994)을 냈고 북한산 노적봉에 ‘경원대길’(1996)과 도봉산 자운봉의 ‘배추흰나비의 추억‘(1998)을 개척했다. 설악산으로도 눈을 돌려 토왕골에 '경원대리지'(1996)와 등반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고 또 등반을 하게 되는 외설악 ’한편의 시를 위한 길‘과 ‘별을 따는 소년들’(1997)길 그리고 설악산 만경대 '별길'(1999) 등을 냈다.

바윗길에 ‘한편의 시를 위한 길’ 그리고 ‘별을 따는 소년들’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무뚝뚝하고 완고한 산악인들은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꼈을 터. 그러나 그가 붙인 서정적인 이름의 바윗길들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산악활동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산악인들의 정서수준을 두 어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듣게 되었다. 오늘을 등반하는 암벽등반가들은 그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악계에는 이제 그와 같은 방식의 독창적인 바윗길의 이름을 짓는 것이 정착되다시피 했다.

김기섭 씨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인수봉 인수B 코스의 항아리크랙에서 약 5미터 아래지점인 레이백 크랙에서 날개를 뜯다가 10여 미터를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운명의 날은 2006년 11월19일 오전이었다. 코오롱등산학교 강사였던 그는 그날 꼭 등반을 부탁한 일행들과 북한산 인수봉을 올랐다. 그날 김기섭 씨는 원고청탁 마감이 가까워서 등반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도 있었다고 말한다. 추락거리는 그렇게 길다고 할 수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경추 6번과 7번에 심한 골절상을 입게 된다. 그때문에 그는 양손가락과 하반신 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후 재활치료를 열심히 해 휠체어를 밀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늘은 이 아름다운 바윗길을 내는 시인을 시기했던 것일까? 평소 두 조의 프렌드와 한 조의 너트세트 그리고 길고 짧은 20개의 퀵드로를 갖고 다니면서 촘촘하게 확보물을 치며 안전등반을 강조하던 그였다. 등반에 앞서 그는 항상 조심했고 쉬운 바윗길이라고 해서 얕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손정준 씨로부터 스포츠 클라이밍을 배웠다. 체력훈련은 주로 성동인공암벽공원에서 했다. 한창 등반과 바윗길 개척에 열중할 때 그의 자연바위 등반능력은 5.11급이었다. 산만큼 술도 좋아해서 산악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타인을 위한 배려도 넉넉했다고 한다. 기자시절 그가 필요했던 건 단 한 벌의 등산복이었을 뿐 남는 등산복들은 모두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가 아끼며 사용했던 2조의 프렌드를 포함한 장비들도 지금은 학교 산악부 후배들의 손에 쥐어져 오늘도 바위를 오르고 있을 것이다.

한국산악사에 기록될만한 그의 공로에 비하자면 그의 현실은 초라하다. 그 흔한 후원회도 하나 없고 만만치 않은 병원비는 친동생들이 갹출해서 메꾸어 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는 현재 공동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으나 효율적인 간병과 저작활동 등을 위해서는 개인 간병인(평균 약 250만원)이 절실한 입장이다. 

이제 찾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모처럼 반가운 사람이 찾아오면 그는 병실을 나와 외출을 할 수 있다. 병원 인근 시장에서 곱창집이나 횟집을 찾는다. 그 식당에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등반을 할 때에는 소주 다섯 병을 마셔도 거뜬했지만 지금은 소주 한 병에서 한 병 반 정도를 마신다. 그가 가진 병은 술과는 크게 관계가 없어 소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한다고 한다. 

“월간 마운틴에 시를 연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시를 써서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요즘 불교와 우리 전통문화에 깊이 빠져 있는 듯 보이는 그는 “등반을 하는 분들에게는 꼭 안전한 등반을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쓰는 글에는 쌍시옷과 쌍디귿이 없다. 그는 누워서 보조기를 끼우고 컴퓨터 자판을 치는데 옆으로 누워서 컴퓨터를 하다보니까 쉬프트키를 누르지 못해서 생긴 결과물이라고 한다. 짧은 글을 쓰는 데에도 팔에 통증을 느낀다. 그가 머무르고 있는 병원에는 개인용 소형 선풍기가 있지만 워낙 병실이 뜨거워서 체온이 올라가면 영 맥을 추지 못한다고 한다.

인수봉과 선인봉 그리고 설악의 깊은 품에 머무르며 남들이 가지 않은 바윗길을 찾아 때로는 장군처럼, 때로는 시인처럼 아름다운 길을 그려보고 볼트를 박아 길을 내던 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언젠가는 휠체어를 타고 백운대 정상에 올라 시를 한 수 읊는다고 해도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일일이 읽어보니 투병을 하면서 힘들었던 과정들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어렵지만 꿋꿋하게 이겨내며 희망을 갖고 사는 그의 글은 시인답게 섬세하면서도 글을 읽는 맛이 있다. 그가 남몰래 울며 들었다는 전인권의 ‘운명’과 강허달림의 ‘미안해요’를 듣다보니 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읽게 되는 듯하여 기자의 가슴 속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 계곡을 따라 흘렀다. 

“북한산 백운대에 앉아있으면 눈이 멀 것 같은 노을이 달려들어 행복의 나라로 인도할 것만 같다”는 김기섭. 하늘이 재주를 시기한 이 아름다운 시인은 오늘도 병상에 모로 누워 자판을 두드린다.

내린천, 여름밤을 위하여                                                           

김기섭

그 해 여름, 우리는 산으로 사방이 막혀버린 내린천
자갈밭 위에 산그늘이 몇 겹 무게로 떨어질 적마다
산 그림자를 주워 모아 우리 젊은 날의 케른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어둠이 켜켜이 쌓이면서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하늘엔 수천수만의 반딧불이, 메밀꽃송이
들이 우리 빈자리를 향하여 마구 쏟아지고 우리는 할
말도 잊은 채 내린천으로 유성이 흘러가는 소리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꽃향기에 취해 강물을 만져보면 두
손 가득 바람이 잡히고 별들이 잡혔다. 그 별들을 받아
가슴에 담자 우리 두 눈에서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강물은 흘러가 돌아오길 거부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강물 저편으로 사라져간 마릴린 먼로, 그 여자의 생애를
생각했다. 강물은 흘러가고 흘러오는 강물 위로 아, 저기
송준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지상에서 천상을 꿈꾸다
토왕폭의 바람이 되어버린 사내, 시대를 앞서간 고독했던
사나이의 알피니즘과 요즘 알피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강물은 모래시계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고 우리 인생도
저 물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쉬워하면서
내린천의 은하수와 송준호, 우리의 외로운 영혼을 위하여
소주잔을 들었을 때 별들이 가득 빛났다.

내린천은 세월 따라 다시 흐르고 그래, 흘러갔던 강물은
뒤돌아보지 말자. 다만 다가올 강물과 우리 삶에 대하여
치열하자고 다짐하면서 우리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자일을
묶고 모진 세상의 벽을 올라,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 집을
짓자고 맹세했다. 우리 앞에서 화톳불은 진달래 꽃잎처럼
활활 타올라 별이 되는데, 우리가 아홉 번 추락 끝에 더듬어
보았던 희망의 휘파람소리는 우리가 올라야 할 벽들 이름처럼
많은데, 우리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될 수 없을까 서로에게
질문하면서 우크렐레 그 우수에 찬 바람소리, ‘황혼의 노래’
부르며 아주 아주 먼 훗날 우리가 죽으면 꽃이나 바람이나
별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 날 내린천으로 별들이 퍼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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