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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윗길을 가다(28) 선인봉 설우길 / 친구가 남겨준 바윗길 그리고 떠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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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기자] 인수봉은 종로요 선인봉은 무교동으로 일컬어지는 시기가 있었다. 이 말은 아마도 1970~80년대에 나온 이야기이리라. 당시 종로가 10대의 청소년에서 20대의 대학생, 젊은 직장인이 주로 모이는 젊음의 광장이었다면 무교동에는 그들보다는 나이가 많은 30~40대 이상의 청, 장년층이 즐겨 찾는 주점들이 밀집해 있던 공간이었다. 10대와 20대가 무교동에서 놀기엔 분위기도 맞지 않았고 술값도 종로에 비해 훨씬 비쌌다. 반대로 청,장년층이 종로에서 모임을 갖기에는 ‘어린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자연히 종로와 무교동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바위꾼들도 인수파와 선인파로 나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두 봉우리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고 있다. 평균연령대를 통계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인수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클라이머들이, 선인에는 노장파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수의 클라이머들이 패션에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다면 선인의 클라이머들은 대체로 튀지  않는 무난한 스타일을 즐긴다. 인수봉을 남성으로 선인봉을 여성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선인봉의 바윗길은 일반적으로 인수의 바윗길보다 등반하기가 훨씬 어려워 짧은 등반경력으로는 선등 또한 만만치 않다.


인수에는 난이도 5.8 급인 인수A와 취나드B의 코스부터 5.9~5.10대의 다양한 바윗길이 있지만 선인에는 가장 만만해 보이는 박쥐길의 난이도가 5.10a이며 그 윗 단계인 표범길은 5.10c에 이른다. 선등자의 안전을 책임지는 볼트의 거리 또한 선인봉이 대체적으로 길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난이도로 치면 인수에도 빌라길이나 청죽길, 학교A 같은 5.12급 고난이도의 바윗길들이 클라이머의 간담을 서늘케하지만 선인에는 이에 못지않은 재원길(5.12a), 경송B(5.12a), 선암(5.12a)길이 버티고 있다.

오랜만에 선인을 찾는다. 이날은 특별히 적벽산악회의 게스트 자격으로 등반을 함께 하게 되었다. 적벽산악회에 게스트가 함께 등반하는 일은 올해 들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적벽산악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다시피한 프로산악회였다. 적어도 고 송종선 대장이 타계하기 전까지는. 송 대장은 지난해 10월26일 그러니까 바로 이맘때 선인봉 하늘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송 대장은 후배산악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송 대장은 암벽대장으로서 권위의식이 없이 후배산악인들에게 늘 겸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등반교육을 할 때는 늘 호랑이와 같은 존재였다. 인수봉이고 선인봉이고 적벽의 송 대장이 출현했다하면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산 아래까지 메아리쳤다. 기자와 송 대장은 함께 등반을 한 적은 없지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고 유머가 전혀 없는 그 이지만 때로 “저 길이 어느 길입니까” 물으면 “첨와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썰렁한 유머로 답해주곤 했다.

이제 송 대장은 떠났지만 후배산악인들이 모여 적벽산악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송 대장과 함께 했던 적벽산악회는 이제 기존의 회원들로만 운영을 하고 있고 송 대장 자녀를 위한 장학금성금을 모금하고 있으며  5,000만원을 목표로 현재까지 2.460만원을 모금했다니 정말 의리의 산악인들이 아닐 수 없다.

10월23일. 날씨도 청명한 이날 도봉산은 단풍으로 곱게 물들여있었다. 아직 활활 타는 단풍은 아니지만 붉게 물들어 가는 능선들이 참 고와 보인다.


이날 첫 바윗길은 설우길이다. 리딩은 배기일 클라이머. 적벽산악회에서는 ‘오후의 노래’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배 클라이머는 인수봉과 선인봉의 어려운 바윗길들을 거의 대부분 선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보기 드문 클라이머이다. 5.12급을 등반하는 클라이머라는 사실은 평소에 절제된 생활과 운동을 통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실력 있는 바윗꾼이라는 의미와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지만 바위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진지하다 못해 무표정하다.

선인봉 설우길은 선인봉 동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골수길과 하늘길이 있고 오른쪽에는 푸른길과 선인B가 있다. 모두 네 마디로 이루어져 있고 등반거리는 총 125미터이다. 최고 난이도는 5.11b에 이르는 짭짤한 난이도의 바윗길이다.

첫째 마디는 마치 벽처럼 서서 위압갑을 주는 페이스 등반과 크랙길. 위압감과는 달리 난이도는 5.9. 그러나 선인의 바윗길을 등반해 본 클라이머라면 선인 바윗길의 난이도는 그저 수치상의 놀음일 뿐 막상 붙어보면 이와달리 몇 등급은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을…

선인봉 바윗길을 개념도 정도만을 보고 온사이트로 쉽게 도전하다가 부상을 입는 일이 허다하다. 선등자의 부상방지를 위해서도 바윗길의 선택에는 경험이 많은 선등자의 조언을 받아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옳다. 

암벽시즌 인수와 선인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구조헬기가 뜨는데 이것이 대부분 부상자를 실어나르기 위해서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자신의 실력보다 한 두 단계 쉬운 바윗길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셍각이 들 때가 많다.

초반 몇 스탭을 오른 후 왼손을 길게 뻗어 가로로 길게 난 크랙을 잡고 한 숨을 돌린다. 이 크랙을 지나고서도 한 스텝의 크럭스가 있다. 선인봉의 바윗길들은 인수와 달리 볼트 사이가 멀기 때문에 선등자들은 더욱 긴장을 하게 된다.

둘째마디는 완만한 슬랩을 지나 크랙을 뜯고 올라 오른쪽으로 긴장되는 트레버스를 거쳐야 등반을 마칠 수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크랙등반을 하며 연이어 작은 슬랩을 먹는 기자에게 산친구 이정화가 “김국장 힘내라”며 격려를 해준다. 오래 전부터 "자일 한번 묶자"고 한 사이였던 이정화와 해를 넘기지 않고 '함등(함께 등반함)'을 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수확이기도 했다. 난이도는 5.10c.


셋째 마디는 완전히 곧추선 듯한 벽과의 싸움이다. 페이스 등반인데 각은 세고 홀드는 잡히지 않는다. 홀드라도 있다면 붙어보기라도 하겠건만 5.11급의 클라이머가 아니라면 오르기가 쉽지 않고 결코 내려갈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기 십상이다. 난이도는 설우길에서 가장 높아서 5.11b. 잡히지 않는 홀드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하다가 쉽게 올라서지 못하고 후등 빌레이어의 텐션에 힘입어 한발자국씩 발을 떼어 놓는다.

넷째 마디 역시 페이스 등반. 난이도는 셋째 마디보다 한 단계 낮은 5.11a이지만 그래도 여기는 한번 붙어볼만 하다. 발을 믿고 한발 한발 딛다보면 드디어 쌍볼트에 확보를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제서야 도봉산의 단풍이 시야 한 가득 들어오고 옆길을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의 표정도 한눈에 들어온다.

손재식의 역작 <한국바위열전>에 보면 설우길은 1980년대 초 은반산악회의 박병원 등이 개척했다고 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은반산악회는 현재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선인봉을 통털어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가진 설우길의 개척당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설우란 무슨 뜻일까? 단순명료하게 바윗길의 이름을 짓던 당시의 추세로 미루어보아 눈에서 만난 친구 ‘설우(雪友)’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사시사철 눈덮인 히말라야에서 만난 친구란 의미의 설우인지도 모르겠다.

설우길에서는 송종선 대장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고 한중희 씨가 유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바윗길이기도 하다. 설우길은 한 대장이 생전에 즐겨 등반하던 바윗길이라고 한다. 죽음마저 두려워 않고 거친 바위를 오르는 클라이머들, 그들은 과연 누구를 닮고자 하는 것일까?

박영석 대장 일행이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 4일째. 그가 우리들의 영원한 ‘설우’로 살아 돌아올 것을 기대해 보면서 선인봉 재원길의 등반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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