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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바윗길을 가다(13) 인수봉 거봉길/ 거봉의 큰 뜻 인수에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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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률 기자] 본격적인 암벽의 계절을 코앞에 3월 하순. 주중에는 철없는 눈이 내려 과연 등반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가득했는데 하루재를 오르는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하루재를 넘어 ‘거인’ 인수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포인트에서 바라보니 인수는 거품을 가득 내서 면도를 한 다음 아직 군데군데 흰 거품이 남아 있는 것처럼 깔끔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서있다.

대슬랩에 이르러 루트 파인딩을 한다. 크랙에는 거의 얼음과 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이날 등반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길은 거봉길과 검악B로 압축되고 말았다. 아무도 에상치 못한 길이었는데 이날의 등반환경이 알려준 길이기도 했다.  

기자가 따라나선 길은 거봉길. 인수 남동면 연습바위로 유명한 짬뽕길(5.10a)의 바로 오른쪽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거봉길은 모두 네 마디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코스의 바윗길이다. 2008년 5월호 '사람과 산'(발행인 홍석하)의 별책부록으로 발행되어 아직도 많은 클라이머들이 애독하는 <인수선인의 바윗길>을 보면 거봉길은 첫째마디가 15m거리에 난이도 5.7, 둘째마디는 32m의 거리에 5.10c의 슬랩구간이고 셋째마디가 27m의 거리에 난이도 5.9, 넷째 마디는16m의 거리에 인공등반인 볼트따기 구간이라고 되어있다. 손재식의 한국바위열전을 보면 중급자 2인1조 기준으로 1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바윗길이다.

막 선등자가 출발하려고 하는데 카메라가 없다. 항상 갖고 다니던 카메라를 두고 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촬영사이즈를 최대로 하고 등반장면을 담아본다. 잘나온다면 다행이지만 사용할 수 없는 화면이 나온다 해도 핸드폰 탓을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첫째 마디 출발지점에서는 오른발의 위치가 불안하기 때문에 약간의 긴장을 하게 된다. 우향 크랙을 잡고 올라서서 오르다보면 홀드가 무척 양호한 편인데 처음 가는 길이라 그런지 홀드 찾기가 어렵다. 난이도가 5.10은 될 것 같은데 정작 이 구간은 5.9 이하의 난이도에 불과하다.

첫째 마디를 마치고 숨을 한번 돌리고 나면 바로 거봉길의 크럭스이자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둘째 마디가 나타난다. 난이도 5.10c의 슬랩구간이다. 이 구간은 제 아무리 크랙등반을 잘 해도 소용없는 곳이다. 요즘 암장운동인구가 늘고 있어 스포츠 클라이머들이 크랙에서는 만만치 않은 저력을 발휘하지만 슬랩길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이 만만치 않은 슬랩길을 오르기 위해 나름대로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본다. 일단 삼지점을 의식한다. 암벽의 미세한 홀드를 두 손으로 잡고 두 발로 지지하여 움직여 나가려 한다면 손이든 발이든 반드시 한 지점이 홀드에서 떼어져야 한다. 이때 남은 세지점이 몸을 유지하는 가장 안정된 자세가 되는데 이때 이 세 지점의 위치가 되도록 한 손의 지점을 중심 축으로 양발에 의한 삼각형이나 그 반대로 한 발의 지점을 중심축으로 양손에 의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어야 안정된 자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건포도보다도 작은, 아니 포도 씨만한 홀드에 엄지와 검지를 맞대 마찰력을 최대로 하고 한 손과 두 발, 두 손과 한 발이 삼지점을 이루어 균형을 갖춰본다. 발끝에 힘을 주고 발목을 최대한 꺽어 마찰력을 일으켜 본다. 그렇게 힘들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떼어 보지만 발끝이 터지며 짧은 슬랩을 먹는다.

근육 저 속에 자리 잡고 잇는 속근이 아직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걸까? 역시 과학적인 상식만으로는 등반을 할 수 없다. 지난 겨울 슬랩등반 연습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해 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이럴 때는 몸이 체득하는 경험만이 난국을 극복 할 수 있다.

슬랩등반은 상대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크랙등반은 홀드를 장아 당기는 적지 않은 근력이 필요하지만 슬랩등반은 발끝의 마찰력이 7할을 차지하므로 섬세하고 유연성이 좋은 여성 등반자에게 더 유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짧은 슬랩을 한번 먹고 약간의 텐션에 의지하며 둘째 마디 첫 몇 걸음을 옮기자 등반은 조금 더 수월해진다. 한 뼘의 위치이동, 불과 1/3 걸음 정도에 불과한 아주 짧은 이동인데도 등반에 관한 아주 작은 기억까지도 되새겨 본다. 어찌 보면 본능은 등반을 알고 있다. 뇌에서 발생한 작은 기억은 척추신경을 타고 손끝과 발끝으로 전해져 등반을 가능케 한다. 아무리 어려운 슬랩길이라 할지라도 클라이머의 앞길에 오르지 못할 바윗길은 없다.

셋째 마디는 크랙이라고 부르기에도 슬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혼합구간이다. 수월해 보이지만 막상 붙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얕보아서일까? 셋째 마디에서도 추락사고는 늘 일어난다.


넷째 마디는 볼트따기 구간이다. 선등자의 경우에는 마지막 볼트따기가 만만치 않다. 마지막 볼트를 넘어서면 마땅한 홀드가 없기 때문에 밸런스를 잘 잡아야 한다. 후등자의 경우에는 볼트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아웃사이드로 볼트를 확실히 밟고 몸을 일으켜 세우면 큰 어려운 없이 다음 퀵드로를 잡을 수 있다.

거봉길의 하강은 두 번에 나누어서 등반을 시작한 곳으로 깔끔하게 하강을 할 수 있다. 하강을 할 때쯤에는 짬뽕길에 자일을 걸고 열심히 연습중인 클라이머들을 쉬 만날 수 있다.

거봉길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개척되었는지 확실치 않은 길이다. 거봉이란 분명 '거대한 봉우리' 히말라야를 상징하는 것일테니 히말라야의 꿈을 이곳에 새겨둔 것은 아닐까?

전북 옥구군에 위치한 선유도에는 망주봉 서벽이 있고 이곳에 5개의 바윗길이 있는데 좌측의 반달형 크랙을 따라 길을 낸 ‘89거봉길’은 서울의 거봉산악회에서 개척했다고 한다. 인수봉 거봉길도 서울의 거봉산악회가 낸 길은 아닐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지난 3월15일자 기사 <한국의 바윗길을 가다 12편 인수봉 아미동길>- 젊은 알피니스트를 부르는 행복한 바윗길 -이 나간 후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송기훈 님은 1952년생으로 경동고 산악부 출신이고 육군사관학교 산악부(31기) 활동을 했다. 아카데미산악회 회원 출신이며 지금도 경동동문산악회 회원으로 왕성한 산악활동을 하는 분이다.

송기훈 님이 보내 온 메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당시 육군대령으로 육사 토목과 교수이던 김덕현 박사(경동고 산악부출신, 육사 13기, 토목학박사, 당시 육사교수, 전 서울산업대학교 교수)를 회장으로 모시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를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그 회원으로 하여 아카데미 산악회를 결성했습니다. 특별회원으로 아미동길을 개척한 이동일씨와 인수산장 주인이던 이경구씨가 있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영문으로 Korea Military Academy라 표기하는데 그래서 산악회 명칭을 아카데미 산악회라 한 것입니다.

1973년 이동일 씨를 주축으로 인수B 코스 옆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하였으나 육사생도 및 교관들은 평일 등반이 불가능하므로 주말 외출을 이용하여 개척등반 과정을 지원하였고 실제 개척등반은 악우 이용민씨와 함께 등반을 하였습니다. 개척 완료 후 김덕현 회장 및 생도들은 축하등반을 함께한 바 있습니다. 

김덕현 회장은 새로운 길의 작명을 고심하다가 아카데미의 첫 글자와 뒷글자 그리고 이동일 씨의 중간 자를 합하여 ‘아미동’이라 하기로 하였으니 ‘아미동’의 ‘아미’는 아카데미의 두 자이기도 하지만 육군을 뜻하는 Army의 뜻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기훈 님은 기자에게 1977년 알프스에서 조난당한 고 유재원 씨를 추모하고 선인봉에 새로운 길을 내고자 후배들이 개척한 선인봉 재원길(5.12a)대한 유래를 설명해주었고 6월중 선인봉 재원길을 함께 등반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누구보다도 알프스를 사랑했고 그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꽃처럼 산화한 유재원, 그리고 그를 추모한 후배들의 아름다운 열정이 모여 선인에 아롱 새겨진 재원길의 등반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여담이지만 과학이 발달한 덕에 인수봉 거봉길 기사를 올릴 수 있었다. 핸드폰으로도 만만치 않은 화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크기의 핸드폰이 500만 화소의 고성능인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카메라 : 삼성전자 애니콜 SPH-W8500 500만화소 AF)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중력과 힘든 싸움을 벌이며 미세한 근육까지 최대한으로 움직여 오름짓하는 암벽등반, 그리고 이 모습을 쉽게 담는 아주 작은 핸드폰.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뿜어내야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은 모습이기도 하다. 흡사 거봉의 꿈을 인수에 새긴 그 때 그 바위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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