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예상을 뒤집은 미국의 양적완화 유지에 외국인 자금이 기다렸다는 듯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신흥시장국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한국 경제의 튼튼한 기초체력이 자금을 끌어들인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원화가치는 8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고, 원화 강세를 예상한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순매수 행진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차분하게 판단하면 꼭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게 정부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오름세가 가파른 만큼 내리막도 급할 수 있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오히려 다른 신흥국의 수요 둔화에 환율 하락이 겹쳐 한국의 성장 연료인 수출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언젠가 시작될 미국의 테이퍼링(tapering·자산매입 축소)으로 금리가 상승, 한국 경제의 취약지점인 가계부채 건전성을 자극할 수 있다는 걱정도 적지 않다.
◇외국인 자금 '바이 코리아' 밀물 추석 연휴 기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내놓은 양적완화 유지 결정은연휴를 마치자마자 한국 금융시장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연준이 국채매입 규모를 당분간 줄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채권금리가 내리고, 값싼 조달비용을 등에 업은 달러화 자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가장 즉각적인 반응은 민감도가 큰 외환시장에서 나타났다. 달러화를 들여와 원화로 바꾸는 수요가 몰리면서 원화가치가 급등(환율이 급락)했다. 환율은 하루 만에10.3원 급락, 종가 기준으로 8개월 만에 가장 낮은 달러당 1,073.8원을 기록했다.
채권시장도 예민하게 움직였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0.05%포인트, 5년물과 10년물 금리는 0.07%포인트씩 하락하면서 한국의 채권가격을 끌어올렸다.
유가증권시장에서도 외국인 투자자가 3천억원 가까이 순매수, 지난달 23일 이후19거래일째 한국 주식을 쓸어담은 외국인 투자자의 누적 순매수는 약 8조3천억원에달했다.
외국인 자금이 물밀듯 들어온 배경은 한국의 경제 상황이 다른 신흥국과는 차별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경상수지 흑자 행진에 한결 좋아진외환건전성과 정부의 국가채무 관리가 신흥국 가운데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의 외국인 자금 유입을 두고 "신흥국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펀더멘덜(기초 여건)이 좋은 한국으로 몰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일각에선 한국 시장이 신흥국보다는 선진국에 가까운 자금 흐름을 보인다는 견해까지 나왔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 경제가 예전과는 달리 펀더멘털(기초여건)이 매우 강해졌기 때문에 금융시장도 신흥국보다는 선진국 특성을 띠게 됐다"고 평가했다.
◇정부당국 "교란요인 될수도…환영보단 경계" 그러나 이런 자금 유입을 마냥 반기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경계론이 한결 더 힘을 얻는다. 급격한 유입은 동전의 양면처럼 썰물 같은 유출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점 때문이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주식시장 위주로 들어온 자금은 변동성이상대적으로 크다"며 "대외 불안의 강도가 커지면 이들 자금 중 상당수가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도 "그간 들어온 자금이 롱텀(long term·장기적 시각)으로 투자 시계가 긴 자금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심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최근 유입된 자금의 상당수는 원화 강세 기조에 베팅해 환차익을 노리고들어왔을 개연성이 큰 만큼 시장 가치를 왜곡하고 더 큰 충격파를 던질 위험이 잠재해 있다.
정부 당국은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외국인 자금 유입이) 단기적으로 호재일 수 있겠지만, 한국 경제 입장에서 보면 교란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사전에 우려하고 대비할 문제"라고 단언했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도 "대규모 유입 자금에는 (단기 차익을 노리고 움직이는)헤지펀드 등도 섞여있다. (한국의) 펀더멘털을 보는 것도 많지만, 짧게 있다가 나갈것 같은 자금도 많이 들어 있다"며 "들어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과 동시에 나갈 것도걱정해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했다.
과거 위기 때마다 '투기자본의 현금인출기'로 불릴 정도로 급격한 자금 유출에시달렸던 한국 시장이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섣불리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인식이 정부 당국의 저변에 깔린 셈이다.
◇"'경상수지 악화→자금유출' 최악상황 대비" 외국인 자금 유입을 걱정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세계 경제의 상황이 아직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국내 경제뿐 아니라 주요 수출대상국과 경쟁국의 움직임도 예의주시해야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신흥국의 금융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원화 강세와 일본 엔화의 약세가 겹치고 선진국의 경기 회복이 기대에 못 미치는 진퇴양난의형국이다.
불안이 잔뜩 고조된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지역은 올해 1~7월 기준으로 한국의수출에서 22.8%와 6.8%를 차지해 중국(25.6%)보다 비중이 크다. 이들 지역의 위기가확산하면 한국 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다 일본이 엔화 약세로 한국과의 수출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중국, 미국등의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 경상수지에 적신호가 켜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상당수 외국인 자금은 주저 없이 한국을 빠져나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수출경쟁력 악화가 경상수지 악화로 이어지고,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라고지적했다.
정부 당국은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상황에 맞는 대응책(컨틴전시 플랜)을 짜고 있다. 테이퍼링은 연기된 것일 뿐, 언젠가는 출구전략에 시동을 걸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긴장과 경계감을 느끼고 리스크를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특히 자금 유출뿐 아니라 유입까지 양방향 변동성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자금이) 엄청나게 빠져나가는 것보다야 들어오는 게 좋지만, 6개월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변동성 확대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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