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협, 국회 법률안 60%에 '반대'…"표만 생각해 입법권 남용"

입력 2019-08-18 17:16
수정 2019-08-19 03:03
Law & Biz

올해 의견서 306건 전수조사


[ 이인혁/박종서 기자 ] 대한변호사협회가 국회의 요청으로 검토한 법률안 중 60% 이상에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 1월부터 이달 5일까지 변협이 공개한 법률안 의견서 306건을 전수조사한 결과다. 다른 어떤 사정보다 법리를 최우선하는 법률가 특유의 보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국회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 편승해 입법권을 남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변협 의견서 곳곳에는 법률안의 실질적 효과가 없다거나 오히려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내용이 다수 발견됐다. 좀 더 깊이있는 논의를 요구하는 법률안도 여럿이었다. 찬성 의견을 제시한 법률안 상당수는 인권 강화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5·18 명예훼손 처벌 강화 ‘반대’

18일 변협 홈페이지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5일까지 국회에서 발의한 법률안 가운데 변협이 제출한 법률안 의견서는 306건이었다. 이 가운데 185건(60.5%)에 반대(일부 반대 포함) 의견을 냈다. 찬성(일부 찬성 포함) 의견은 91건(29.7%)에 그쳤다. 명확한 판단을 보류한 것은 30건(9.8%)이었다. 변협은 산하 상설기구인 법제위원회를 통해 국회의 검토 요청이 올 때마다 내부 논의를 거쳐 의견서를 내놓는다.

변협은 국민의 공분을 자아낸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회의원들이 경쟁적으로 발표하는 법률안 대부분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대표발의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도 마찬가지였다. 이 의원은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5·18 유공자를 괴물집단에 비유했다는 폄훼 발언 논란이 일자 5·18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냈다. 이에 대해 변협은 “현행법으로도 5·18 희생자에 대한 명예훼손을 처벌할 수 있다”며 “특정 사건을 대상으로 한 명예훼손을 별도로 가중처벌하는 조항은 없으므로 5·18만을 대상으로 형법에 가중처벌 조항을 두자는 주장의 타당성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기업 임원들이 운전기사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여론이 끓어오르면서 고용주에 대한 처벌 강화 취지의 법안이 나왔을 때도 변협은 반대했다. 입법 취지는 이해하지만 기존 법률로도 처벌이 가능하고 개정안이 모호한 점을 비춰 처벌규정을 신설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지역구 챙기는 법안도 ‘반대’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에만 우호적인 법안을 낸 것에도 제동을 걸었다. 바른미래당의 세종시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중로 의원이 세종시에 지방법원과 행정법원을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의원은 세종시 인구가 6년 만에 30만 명을 돌파했고,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법원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변협은 “(세종시에서) 사건이 얼마나 증가할 것인지 과학적인 예측이 필요한데 개정안에서는 아무런 검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총론에서는 찬성하지만 실현 방식에 반대하는 개정안도 많았다. 민법에서 쓰이는 ‘익일(翌日)’이란 표현을 ‘다음날’로 바꾸자는 법안에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변협은 “현행 법률에 일본어식 표현과 불필요한 한자어 등이 많은데 산발적으로 개정을 거듭하는 것보다는 한꺼번에 개선하는 게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법안이 생산적이든 그렇지 않든 일단 발의해 국민의 주목을 끄는 게 좋다는 인식이 국회의원 사이에 팽배해 있는 것 같다”며 “한국 사회에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할 수도 있어 법률 전문가들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20대 국회에서 지난 3년 동안 발의한 법안은 2만1283건에 이른다.

민주당보다 한국당 법안 반대율 높아

환영의 뜻을 밝힌 개정안도 있다. 변협은 외국인 피고인의 방어권을 강화하기 위해 형사법정에서 원격 영상 통역을 도입하자는 금태섭 민주당 의원의 법안에 찬성했다. 부모가 이혼할 때 미성년 자녀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하자는 가사소송법 개정안도 타당한 의견이라고 평가했다.

변협은 찬반 의사만 밝히는 데서 벗어나 수정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송갑석 민주당 의원은 건강이 나쁜 피고인에게 보석을 허가할 때 해마다 두 번 건강상태를 확인해 건강이 나아지면 재구속하도록 법안을 냈다. 변협은 “건강상태의 조사 주체를 검사가 아니라 법원이 맡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변협이 찬반 의사를 전할 때 변호사업계의 이해관계를 두드러지게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신용카드회사와 채권추심회사의 빚독촉을 변호사가 대신 받아줄 수 있도록 하는 채권추심법 개정안에 찬성 의사를 밝힌 것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독거노인에게 무료 법률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는 노인복지법 개정안에 의무화는 안 된다고 강조한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국회 발의는 아니지만 지난달 피의자 국선변호 대상을 확대하자는 법무부 안에도 반대했다. 국선변호가 확대되면 일반 변호사의 사건 수임이 어려워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조사에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률가 출신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들이 변협에서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법률가 출신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79개) 가운데 68.3%가 변협에서 반대 의견을 받았다. 한국당보다 민주당 의원들이 대표발의한 법안이 변협으로부터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민주당 의원 법안에 대한 반대 비율은 59.7%였지만 한국당 법안에 대한 반대 비율은 66.2%였다.

이인혁/박종서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