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출규제 대응
국내 기업 기술자립 지원하고
정부 지원금 확보까지 '두 토끼'
[ 정의진 기자 ]
서울대 등 국내 주요 대학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국내 기업의 기술 자립을 지원하는 교내 기구를 속속 신설하고 있다. 지난 5일 KAIST를 시작으로 1주일 만에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가 차례로 ‘기술자문단’, ‘기술자립화지원단’ 등 비슷한 이름의 기구를 새로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기술 자문과 연구개발을 통해 산업계의 피해를 막는 데 대학이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13일 대학가에 따르면 고려대도 비슷한 기구를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대학들이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자립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기구를 경쟁적으로 개설하는 것은 결국 대학에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학은 기술 자립이 급한 기업으로부터 기술 제공과 공동연구 진행의 대가로 연구비를 받는다. 무엇보다 대학들은 중소·중견기업에 지원되는 정부의 정책자금을 연구비 확보를 위한 ‘금맥’으로 여기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초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한 이후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자금 지원 계획을 연달아 내놓았다. 핵심 기술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이달 초 국회에서 통과시킨 추가경정예산만 2732억원이다. 정부는 기술보증 지원 등 추경 이외의 예산으로도 지원하는 방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 교수는 “기술 자립이 가장 중요한 목표지만, 등록금 동결로 재정에 압박을 느끼는 대학들이 기업에 풀리는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의도야 어떻든 산학협력이 활성화되고 국내 기업의 기술 자립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 대학들의 적극적 움직임은 긍정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다만 각 대학이 발표한 기구들이 차별화되지 않아 중복 투자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지원 기구를 신설한 대학들은 한목소리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분야에서 기술 자립이 시급한 품목부터 개발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조기에 공급 안정화가 필요하다”며 핵심 품목들을 지정한 만큼 지원금을 유치할 가능성이 큰 품목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어느 대학이 어떤 분야에 강점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문의가 이뤄지고, 비슷한 자문을 서로 다른 대학에 따로 할 가능성이 높다. 대학 간 경쟁이 기술 개발을 촉진할 수도 있지만 기술 자립의 관점에서 봤을 때 대학마다 제각각 연구개발에 나서는 것보다 대학 사이에 유기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공학한림원장)는 “대학마다 비교우위에 있는 기술 분야가 분명 다르다”며 “빠르고 실질적인 기술 자립을 위해선 대학별 지원단이 각자도생하지 않고 기업으로부터 문의가 오면 경쟁력 있는 다른 대학을 소개해주는 등 협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