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등 노동규제 '대개혁'…부품·소재 R&D 불 밝혀야

입력 2019-08-05 17:44
수정 2019-08-06 01:05
한·일 경제 전면전 - 기업을 뛰게 하라
(1) 親기업이 답이다


[ 도병욱/김낙훈 기자 ] 연매출 3000억원대인 A사(화학업체)는 경기도에 있던 연구개발(R&D)센터를 해외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내년 1월(50~299인 사업장 기준)부터 주당 최장 근로시간이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드는데, 이를 지키기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 대표는 “연구소 특성상 업무가 특정 기간에 몰리는데,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으로선 주 52시간을 지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그는 “정부와 정치권이 소재, 부품을 국산화하자고 외치기 전에 현실의 벽부터 해결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대기업 구매담당 임원은 지난달 일본에서 수입하던 소재를 국내 업체로부터 납품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다 포기했다. 접촉한 협력사 모두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개발할 시간이 없는 데다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올라 인건비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R&D는 ‘올스톱’ 직전

5일 경제계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달 안에 근로시간 및 최저임금 제도 개선을 위한 건의문을 정부에 낼 계획이다.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맞서 소재 및 부품 국산화를 달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기업인들은 각종 노동규제 탓에 시도도 못할 판이라고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경총 관계자는 “부품 및 소재 국산화를 이루려면 중소기업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여건부터 마련해야 한다”며 “꽉 막힌 노동규제를 풀지 못하면 답이 없다고 판단해 기업인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달부터 일본이 수출규제에 들어간 3개 품목(포토레지스트·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 R&D 업무에 대해 주 52시간 제도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해당 근로자의 동의를 얻고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받으면 시간제한이 없는 특별연장근로를 3개월간(재신청 시 연장 가능) 하는 방식이다.

산업계에서는 이 정도 수준의 규제 완화로는 부품 및 소재 국산화를 달성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적용 분야가 지나치게 좁은 데다 절차(근로자 동의 및 고용부 장관 인가)마저 까다로워서다.

기업은 선택근로제 정산 기간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선택근로제는 1주일 단위가 아닌, 일정 기간의 근무시간을 평균해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도록 하는 제도다. 기업은 정산 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3~6개월로 확대하자고 주장하지만, 여권과 노동계가 반대하고 있다.

중견 로봇장비업체를 운영하는 K씨는 “중소기업에서는 연구원이 야근을 자청해도 경영진이 ‘나 감옥 가기 싫으니 빨리 퇴근하라’고 독려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적어도 R&D 분야에는 근로시간 관련 제도를 유연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韓 습관성 파업할 때 日 무파업 질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소재, 부품 국산화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도 적지 않다. 최저임금이 급등하면서 중소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인건비 규모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반도체 부품사 대표는 “해마다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올라 직원들을 내보내야 할 상황”이라며 “일본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와 R&D에 시간, 비용을 쏟아부으라는 주문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꼬집었다.

경제계는 업종별·지역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중소기업(비엠금속)을 운영하는 서병문 중소기업중앙회 수석부회장은 “지역별로 물가 수준이 다른 만큼 최저임금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게 맞다”며 “현행 최저임금 제도가 유지되면 중소기업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직된 노사관계도 문제 중 하나로 거론된다. 한국의 강성노조는 해마다 습관성 파업을 하고, 기업은 노조 파업을 막기 위해 임금 인상을 수용하는 현실에선 소재 및 부품 국산화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1987년 설립 이후 네 차례를 제외하고 매년 파업했다. 경쟁사인 일본 도요타가 1962년부터 57년째 무파업 기록을 이어가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도병욱 기자/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