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년 세계경제 이끈 브레턴우즈, '아메리카 퍼스트'에 흔들

입력 2019-08-04 17:49
수정 2019-08-05 01:22
글로벌 리포트

도전 받는 브레턴우즈체제


[ 설지연 기자 ]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10개월여 앞두고 있던 1944년 7월 1일. 세계 44개 동맹국 대표 730명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집결했다.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역할이 막강했던 만큼 주요국 대표들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국제체제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승전국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의 거대한 소비시장을 무제한으로 세계에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유무역 질서 브레턴우즈체제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패전국인 독일에도, 소련과 갈등을 빚는 중국에도 자국 시장을 개방했다. 이 덕분에 유럽과 일본, 한국은 폐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다.

지난 75년간 세계에 번영을 가져온 브레턴우즈체제가 최근 위기를 맞았다. 미국은 대미(對美) 무역수지 흑자국들을 겨냥해 보호무역 기조를 강화하며 국제통상 질서의 기본 축을 흔들고 있다.


세계 경제 성장 이끈 브레턴우즈체제

“우리는 각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는 가장 현명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국제 협력, 즉 단결을 통한 공동의 목표 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헨리 모겐소)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 폐막 연설에서 의장이던 헨리 모겐소 당시 미국 재무장관은 이 같은 깨달음이 2차 세계대전의 큰 교훈이라고 했다. 각국 대표들이 22일간의 논의 끝에 내놓은 브레턴우즈협정은 ‘금 1온스의 가격을 35달러로 고정한다’는 통화정책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협정은 전후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다. 세계 각국은 금환본위제에 따른 환율 안정 아래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 성장을 추구했다.

그러나 브레턴우즈협정 자체는 1971년 깨지고 말았다. 미국 경기가 둔화하고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일부 국가가 자국 통화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자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더 이상 금을 달러로 바꿔줄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제협력을 통한 공동이익 실현’이라는 브레턴우즈체제의 기본이념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등 국제기구를 통해 계승됐다. 1948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이어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 질서를 떠받쳤다. 또 선진국 모임인 주요 7개국(G7), 주요 선진국과 신흥국이 두루 참여한 주요 20개국(G20) 같은 국가협의체도 브레턴우즈체제의 이념을 공유했다.

그 덕분에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과 불평등은 크게 완화됐다. 런던정치경제대·브루킹스연구소 연구팀에 따르면 1950년 이후 세계 인구가 약 세 배로 증가하는 동안 1인당 소득은 네 배 늘어났다. 1950년부터 2017년 사이 세계 무역량은 39배 불어났다.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 수석경제칼럼니스트는 “브레턴우즈체제 시대를 경제 성과로 평가한다면 ‘승리’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75년이 지난 지금 브레턴우즈체제를 주도했던 미국의 입장은 크게 달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 제품을 생산하고, 우리 기업을 훔치고, 우리 일자리를 파괴하는 다른 나라들의 만행으로부터 국경을 지켜야 한다”며 “보호(주의)는 위대한 번영과 힘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에 보호무역주의를 강도 높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뜯어고쳤다. 관세라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역확장법 232조를 활용해 유럽연합(EU) 등의 수입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최대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중국산 제품에는 2500억달러어치에 25%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다음달부터 나머지 3000억달러 제품에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급기야 개발도상국 지위를 둘러싼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발전된 국가가 WTO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지 않도록 방안을 찾으라”고 미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했다. 중국을 겨냥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한국도 피해갈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아 쌀 등 농산물 수입 물량을 제한하고 있다.

일본도 이 같은 무역갈등 흐름에 편승했다.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고 한국에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의 수출을 제한했다. 이어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배제하는 추가 경제보복을 강행했다. 연간 100조원 이상을 교역하는 양국이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경제전쟁’에 들어간 것이다.

커지는 세계경제 통합 회의론

국제통상 질서가 이같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는 기존 자유무역주의가 자국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신흥국들이 경제 규모를 키우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미국 등 강대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 통합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보호주의로 돌아선 것도 브레턴우즈체제에서 얻는 전략적 이득보다는 체제 유지비용이 더 크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연간 4000억달러가 넘는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중국은 G2로 올라서며 미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 또 미국은 거대한 내수국가이기 때문에 수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여기에 셰일가스 혁명으로 에너지까지 자급할 수 있게 되면서 중동산 석유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 ‘세계 경찰’ 노릇을 할 필요성도 약해졌다.

유럽에선 영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2016년 EU 탈퇴를 결정했다. EU 공동체를 나와 독자적인 대외 통상 교섭과 재량권을 되찾고, 이민자 통제와 안보정책 결정권 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WTO, WB, IMF 등 국제기구는 강대국들의 힘 대결에 휩쓸려 ‘식물 기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직접 주도해 세운 WTO에 탈퇴 위협까지 하며 통상 질서를 흔들고 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