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경제 전쟁, 중국만 웃는다

입력 2019-08-04 17:31
수정 2019-08-05 00:36
中 "이 틈에 시장 잡자" 잰걸음

애플에 "우리 제품 써달라"
韓 반도체 인재 영입 나서


[ 황정수/고재연 기자 ]
“두 호랑이의 싸움을 산 위에서 구경한다(坐山觀虎鬪).”

최근 중국 경제계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전쟁’을 하는 동안 중국 기업들이 실리를 챙길 수 있을 것이란 의미다. 디스플레이업체 BOE,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SMIC 등 ‘이류’로 취급받던 중국 업체들은 한·일 갈등의 틈을 파고들면서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하면 중국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일 양국의 ‘강(强) 대 강’ 대결을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중국 업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BOE는 미국 애플에 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공급 가능성을 타진했다. 지금은 삼성디스플레이가 독점 공급하고 있다. 애플은 삼성디스플레이가 제품 공급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우려해 BOE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지난달부터 OLED의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화학적 방식 증착기 등도 규제 대상에 포함될 예정이다.

한국 업계가 어수선한 틈을 타 핵심 반도체 인력을 빼가려는 시도도 포착됐다. 중국 반도체업체 푸젠진화는 지난달 D램 사업부문 경력사원 채용공고를 내면서 ‘10년 이상 삼성전자 등에서 근무한 경험’을 요구했다. 지난달 D램사업 진출을 전격 선언한 칭화유니도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한국 기업 출신 퇴직자 영입에 나섰다. 카이성푸화학, 방화그룹 등 중국 반도체 소재 기업들은 일본 수출규제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한국 반도체기업들이 이들 업체의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소식에 주가가 치솟기도 했다.

대만 업체들도 기회를 엿보고 있다.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점유율 48.1%)는 지난달 3000명 채용 계획을 발표하며 2위 삼성전자(19.1%)와의 격차 벌리기에 나섰다. 난야, 윈본드 등 대만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도 일본 내 한국 반도체 점유율을 빼앗기 위해 준비 중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한·일 갈등이 지속되면 중국과 대만 기업들의 이익만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삼성 발목잡힌 틈 노려…中 BOE, 애플에 모바일OLED 공급 타진

중국, 대만 등 중화권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이 한·일 갈등의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상대국 제품을 배제하는 틈을 노려 핵심 산업 분야에서 ‘점유율 확대’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설비·인력 투자를 통해 사업 경쟁력을 높이고 글로벌 시장에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이런 시도는 중국, 대만 업체들의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이 길어질수록 양국 산업계의 피해가 커지고, 후발주자인 중국 업체들의 추격을 허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애플 공급업체 노리는 中 BOE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중국 선전증권거래소에서 디스플레이업체 BOE 주가는 지난달 초보다 14.2% 상승했다. 같은 기간 삼성디스플레이를 자회사로 둔 삼성전자가 4.4% 떨어지고 LG디스플레이는 23.8% 급락한 것과 대조적이다.

디스플레이업계에선 BOE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발판으로 ‘스마트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란 기대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BOE는 스마트폰용 OLED 시장에서 세계 1위 삼성디스플레이를 추격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삼성디스플레이의 모바일 OLED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88.0%로 전년 동기(95.7%)보다 하락했다. BOE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0.1%에서 5.4%로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이 BOE를 공급사로 점찍고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신에 보도됐다. 애플이 일본의 소재 수출 규제로 삼성디스플레이가 제품 공급에 차질을 빚을까 우려해 중국 BOE를 새로운 공급사로 받아들이려 한다는 얘기다.

BOE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BOE는 2023년까지 모바일용 OLED 생산 규모를 월 18만 장 수준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최근 공개했다. 삼성디스플레이 생산능력인 월 16만5000장보다 많다.


난야, 윈본드 “일본 D램 시장 노린다”

반도체 시장에서도 중화권 기업들은 한·일 갈등의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방화그룹 등 중국 반도체 소재 업체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지 공장에 불화수소 등을 공급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한국 인력 빼가기’에도 혈안이 돼 있다. 2016년부터 D램 생산을 시도하고 있는 푸젠진화와 지난달 D램 생산을 전격 선언한 칭화유니가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근무 경력’을 경력사원 채용 요건으로 내걸고, 한국 기업 퇴직자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 기업들은 일본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의 점유율을 빼앗아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면 D램, 낸드플래시 등 반도체 수출도 ‘깐깐하게’ 심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 재무성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에 수출한 메모리 반도체는 약 1조2700억원(한국에서의 수출 7928억원+중국 현지공장 수출 4770억원)으로 집계됐다. 한국 기업들의 대일본 반도체 수출이 막히면 난야, 윈본드 등 대만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고스란히 한국 몫을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기대가 반영돼 대만 주식시장에서 윈본드와 난야 주식은 지난달 초보다 각각 22.4%, 12.1% 올랐다.

한국 기업 투자는 줄줄이 연기

한국 기업들은 한·일 갈등에 발목 잡혀 계획된 투자도 미루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업황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충북 청주 M15 공장의 추가 클린룸 확보와 내년 하반기 준공 예정인 경기 이천 M16 공장의 장비 반입 시기를 수요 상황에 맞게 재검토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하반기로 예정했던 경기 평택 P2 라인 설비투자를 내년 상반기로 미룬 것으로 알려졌다. 3000명 인력 채용과 함께 하반기 5조원대 투자에 나선 대만 TSMC, 12조2000억원 규모 D램 라인 설비 투자를 진행 중인 윈본드 등 경쟁사에 뒤처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산업계 관계자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기로 함에 따라 두 나라 기업들은 소재 조달은 물론 제품 수출길까지 막히게 됐다”고 지적했다.

황정수/고재연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