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日 '화이트리스트 폭탄' 83개 품목에 치명타

입력 2019-08-01 17:36
수정 2019-08-02 07:47
2일 韓제외 강행할 듯…한경, 日수입품 1383개 분석

日 의존 50%·수입액 1000만弗 넘어 '高위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이 45% 달해


[ 서민준/박재원 기자 ]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면 국내 기업들이 83개 핵심 품목을 조달하는 데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대일(對日) 수입액이 1000만달러 이상이고 일본 수입 비중이 50% 이상인 품목들이다. 특히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의 소재·부품 장비가 절반 가까이 됐다.

1일 한국경제신문이 일본 수출무역관리령의 통제 대상 품목에 기재된 전략물자를 전수 조사한 결과 일본으로부터 수입 실적이 있는 품목은 1383개로 집계됐다. 지금은 수입 포괄 허가 대상이지만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수입 때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중 수입 규모가 크고 일본 의존도가 높은 고(高)위험 품목은 83개였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소재·부품·장비는 실리콘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등 핵심 소재를 포함해 37개(44.6%)로 나타났다. 세정, 노광, 현상, 식각, 검사 등 거의 모든 제조 공정에 쓰이는 품목들이다. 석유화학·화학제품(8개), 공작기계(7개), 철강·알루미늄(7개) 등 분야도 다수 포함됐다. 핵심 제조업종 대부분이 일본의 2차 수출 규제의 사정권에 들어있는 셈이다.

일본은 2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교도통신 등 현지 언론도 일본 정부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복수의 일본 정부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일 태국 방콕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55분간 회담을 했지만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외교부 당국자는 “양측 간극이 상당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두 시간가량 상황점검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는 이낙연 국무총리,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정경두 국방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레이저기기·광택기 日 의존도 100%…주력 제조업 곳곳에 '급소'

일본이 지난달 4일 한국에 단행한 수출규제는 한국 경제의 ‘급소’를 찔렀다.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일반인에게는 생소하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소재들이다. 이들 제품은 일본에서 수입할 때 원래 3년에 한 번만 허가를 받으면 됐다. 하지만 지난달 4일 이후 건건이 허가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규제 이후 허가는 ‘0’이다. 조만간 기업들이 보유한 3개 소재 재고가 바닥나면 생산 감소 등 피해가 현실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문제는 일본이 노릴 만한 급소가 더 많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일본 전략물자를 전수 조사한 결과 대일(對日) 수입액이 1000만달러를 넘고 일본 수입 의존도가 50% 이상인 물품은 83개에 이르렀다.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 기업에서도 추가 수출규제 때 타격이 클 물품을 별도로 분석했는데 80여 개로 나왔다”고 말했다. 이 중 반도체 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만 37개(44.6%)였다. 석유화학·화학제품(8개), 공작기계(7개), 철강·알루미늄(7개) 등 주요 제조업에도 급소가 적지 않았다.

일본이 예고한 대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빼면 고위험군에 있는 품목 중 상당수가 규제 대상이 될 전망이다.

반도체 전 공정 사실상 일본에 의존

한국경제신문은 전략물자관리원의 ‘전략물자-HS 연계표’를 기반으로 전략물자를 수출입 통관 때 쓰는 HS 코드(10단위)로 변환한 뒤 각 품목의 지난해 수입 현황을 조사했다. 지금도 개별허가를 받는 무기류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결과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37개 품목이 고위험 제품군에 포함됐다. 실리콘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에폭시 수지 등 핵심 소재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증착·노광·도포·식각·검사 등 주요 공정에도 빠짐없이 고위험 품목이 있었다. 수입액으로는 실리콘 웨이퍼가 8억4870만달러로 가장 많았다. 반도체 소자 분석기 등 검사 장비(4억6330만달러), 디스플레이 압착 공정에 쓰이는 실리콘 러버 시트(3억5740만달러)가 뒤를 이었다. 일본 수입 비중으로는 반도체 디바이스 제조에 쓰이는 레이저작동식 기기(100%), 평판디스플레이용 연마기·광택기(99.9%), 액정표시장치(LCD) 제조용 식각 기기(99.4%) 순이었다.

핵심 소재는 물론 그 소재를 만드는 기기, 재료도 일본 수입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실리콘 웨이퍼 제조에 쓰이는 식각·세척 기기(92.9%), 연마기·광택기(88.9%), 석영 도가니(99.2%) 등의 일본 수입 비중이 90%를 넘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SK실트론 등이 웨이퍼 국산화율을 높이려 노력하는데 웨이퍼 제조용 기기의 일본 의존도가 커 여의치 않다”고 지적했다.

미래 산업도 일본 규제 사정권

공작기계도 높은 기술력을 요하는 부문 위주로 7개의 고위험 품목이 있다. 금속 가공용 머시닝센터(자동공구 교환장치를 장착한 공작기계)와 컴퓨터 수치제어(CNC) 선반·연삭기 등이다. 이런 장비에 수출규제가 시행되면 국내 공작기계 업체는 물론 관련 장비를 많이 쓰는 자동차, 조선, 건설장비 등 부문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석유화학·화학제품 분야에선 자일렌, 톨루엔 등 합성수지 기초 원료가 다수 포함됐다. 화학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들 원료는 다른 나라 수입량을 늘려 대처할 수는 있으나 수입처 대체에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라고 전했다. 일본 수입 비중이 68.0%인 플루오르화암모늄은 불화수소처럼 필요한 부위만 부식시키는 식각 공정에 광범위하게 쓰인다. 철강은 주로 특수강 분야 중간재가 고위험 품목으로 분류됐다. 텅스텐·몰리브데넘 등 광물·광물성 생산품 6개도 일본 수입 의존도가 높았다. 차세대 주력 산업인 2차전지에서도 핵심 소재인 ‘분리막’의 일본 수입액이 작년 1억4780만달러, 수입 비중은 83.4%에 달했다.

수입 의존도가 50% 미만인 전략물자도 안심할 수 없다. 한국이 미래성장동력으로 꼽는 수소차의 핵심 소재 탄소섬유가 대표적이다. 김건우 무역협회 연구원은 “지난해 탄소섬유의 일본 수입 비중은 39%에 그치지만 고품질이 필요한 분야는 일본 도레이 등의 제품을 대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서민준/박재원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