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수사' 영향으로 고소·고발 2배↑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나"
[ 이인혁 기자 ]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고발당하는 공무원이 급증하고 있다.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적극적으로 일하면 직권남용에, 그렇지 않으면 직무유기 시비에 휘말린다”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온다.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도 운신의 폭이 좁아져 공직사회가 경직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 4년 새 두 배로
30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은 2015년 6045건에서 지난해 1만4502건으로 2.4배로 늘었다. 같은 기간 직무유기 접수 건수도 9137건에서 1만7148건으로 두 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8313건의 직권남용과 1만1916건의 직무유기 고소·고발이 접수되는 등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이른바 ‘적폐수사’로 전직 대통령과 대법원장 등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된 것이 이 같은 현상의 계기로 풀이된다.
특히 같은 행위에 대해 한쪽은 직권남용을, 다른 쪽은 직무유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공화당이 광화문에 설치한 천막을 서울시가 강제로 철거하자 우리공화당은 지난달 박원순 시장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서울시가 더 적극적으로 천막 철거에 나서야 한다며 박 시장이 직무를 유기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2015년에는 서울시가 같은 장소에 세월호 천막 설치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당한 바 있다. 서울시가 천막 설치를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반대자로부터 고발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중앙부처의 한 공무원은 “행정 법규정에는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표현이 많다”며 “담당자 재량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직권남용 혹은 직무유기의 빌미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할 수 있다’고 적시돼 있는데도 왜 안 했느냐”와 “‘~할 수 있다’고만 했지 의무사항은 아닌데도 왜 했느냐”는 문제 제기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국민 피해로 돌아올 것”
여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정치권에서 직권남용과 직무유기가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많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지난 5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검찰의 부실수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자 그를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1월에는 옛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이 과거 불공정하게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을 처리했다며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전체 직권남용 고소·고발사건 중에서 범죄 요건이 성립돼 재판에 넘겨진 비율은 0.4%에 불과했다. 직무유기 역시 이 비율은 0.07%에 그쳤다. 그만큼 ‘묻지마식’ 고소·고발이 많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풍조가 이어지면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고발이 들어오면 검찰은 수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고소·고발의 남발로 수사력이 낭비되고 공무원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의 공무원 직접 견제가 늘어나면 공직사회에 자극을 주는 등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서도 “현재처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직권남용과 직무유기가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