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불어난 규제 공무원
(4) '재계 저승사자' 공정거래위원회
객관적 증거 없으면 과징금
공정위, 내달 말부터 부과
[ 이태훈 기자 ]
공정거래위원회는 객관적 증거 없이 ‘원조 OO족발’ ‘원조 ××골뱅이’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프랜차이즈에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가맹사업법령 고시를 제정해 시행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원가 공개에 이어 공정위가 또 다른 규제로 가맹점주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29일 공정위에 따르면 ‘가맹사업거래상 허위·과장 정보 제공행위 등의 유형 지정고시’ 제정안이 8월 8일 행정예고를 마치고 다음달 말 시행된다. 가맹사업법령에는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주와 창업희망자에게 제공해선 안 되는 허위·과장 정보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고시는 이를 다시 58개 유형으로 세분화했다.
고시는 ‘다른 사업자가 먼저 제조한 사실이 있음에도 대한민국 최초 OO원조집이라는 표현을 기재한 경우’ 등을 예시로 들었다. 공정위 관계자는 “원조라는 표현을 쓰려면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고시를 어기면 본사 매출의 2% 또는 5억원 이하의 과징금을 물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족발 보쌈 등의 경우 원조라는 표현을 쓰는 업체가 한둘이 아닌데 어디가 원조인지 증명하라니 혼란스럽다”며 “상표권 특허권 분쟁이 생기면 법정에서 다투면 되는데 공정위가 사전 규제를 해버리면 수많은 가맹점이 간판부터 다 바꿔야 한다”고 했다.
甲질 막겠다며 106명 증원한 공정위…기업 '저인망' 압박
공정거래위원회는 문재인 정부 3대 경제정책 중 하나인 ‘공정경제’를 다루는 주무부처다. ‘갑’의 횡포를 막고 ‘을’을 보호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지난 2년간 정원을 106명(2016년 588명→2018년 694명) 늘렸다. 대기업과 소상공인 전담 부서를 출범시켜 대대적으로 기업을 조사하고 각종 규제를 만들어냈다.
프랜차이즈 겨냥한 공정위
공정위는 현 정부에서 두 개 부서를 신설했다. 대기업 일감몰아주기 사건 등을 전담하는 기업집단국과 소상공인 보호 업무를 맡는 유통정책관실이다.
유통정책관실은 지난 19일 ‘가맹사업거래상 허위·과장 정보제공행위 등의 유형 지정고시’ 제정안을 마련했다. 이 고시는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주나 창업 희망자에게 제공해선 안 되는 허위·과장 정보 58가지를 나열해놨다. 다음달 8일까지인 행정예고 기간이 끝나면 같은 달 말께 시행될 예정이다. 이를 어기면 가맹사업법 위반이 돼 본사가 매출의 2% 또는 5억원 이하의 과징금을 물 수 있다.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 관계자는 “고시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례가 너무 많고 촘촘해 웬만한 프랜차이즈는 빠져나가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가맹본부가 구입을 강제한 거래로 인한 특수관계인의 경제적 이익 현황을 누락한 정보공개서를 가맹 희망자에게 제공한 경우’란 조항이 있는데, 협회 관계자는 “특수관계인이라는 게 어디까지인지 가맹사업법에도 정의가 안 돼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 대표와 생닭을 공급하는 업체 대표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면 두 사람이 서로 친하지 않더라도 이 고시로 인해 분쟁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고시는 ‘자신이 공급하는 OO를 다른 사업자가 먼저 제조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초 OO원조집이라는 표현을 기재한 정보를 제공한 경우’도 금지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조가 어디인지 입증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족발 보쌈 등의 프랜차이즈에선 원조라는 표현이 관용구처럼 쓰인다”고 했다.
프랜차이즈업계에 큰 논란을 불러온 ‘원가 공개’도 유통정책관실의 작품이다. 프랜차이즈 본사는 다음달부터 차액가맹금(본사가 가맹점에 공급하는 물품의 마진)과 주요 품목 공급가격의 상·하한선 등을 공개해야 한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정책이 소상공인인 가맹점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의 새로운 규제로 ‘원조 OO집’ 등의 간판을 모두 바꿔야 한다면 가맹점주가 가장 큰 손해”라며 “이때까지 쌓은 브랜드 인지도와 신뢰도 등이 무너져 매출이 하락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활한 ‘재계 저승사자’
유통정책관실보다 1년 먼저 만들어진 기업집단국은 대기업으로부터 ‘재계 저승사자’로 불린다. 2017년 9월 조직 출범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공정위 조사국이 부활했다”란 말이 나왔다. 조사국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부터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까지 있었던 조직이다. 이 기간 삼성 대우 LG 등 주요 대기업에 대해 부당 내부거래 금지 등의 혐의로 17번의 조사를 벌여 총 25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기업들이 과도한 직권조사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자 노무현 정부는 조사국을 폐지하고 주요 기능을 여러 국으로 분산해 힘을 뺐다.
조사국이 기업집단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다시 등장한 건 “공정위의 대기업 전담 부서를 확대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때문이다. 기업집단국이 지금까지 조사를 벌여 제재를 결정한 대기업집단은 하이트진로 효성 LS 대림 태광 등이다. 여기에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미래에셋 한화 금호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다. 이들 기업에 대한 제재 여부가 언제 결정될지는 불확실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은 그냥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말했다.
기업집단국이 가장 많이 적용하는 혐의는 일감몰아주기다. 대기업 계열사들이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부당이득(사익편취)을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업들이 보안상의 이유로 내부거래를 하는 경우도 일감몰아주기 제재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올 들어 삼성SDS 등 대기업 계열 시스템통합(SI)업체 50여 곳을 대상으로 내부거래 비중 등을 조사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일감몰아주기를 피하기 위해 삼성SDS가 아니라 LG CNS나 SK C&C를 SI 업체로 쓸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