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의원 '워싱턴 충돌'…경제보복 거친 설전에도 美는 '침묵'

입력 2019-07-28 17:11
수정 2019-07-29 01:16
험악했던 3國 의원회의

서로 밀어붙이며 날선 공방전
발언권 얻으려 경쟁하고
日 의원 거친 표현 쓰며 도발


[ 주용석/하헌형 기자 ] 한국과 일본 국회의원들이 지난 2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의원 회의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을 두고 정면 충돌했다. 매년 두 차례 열리는 3국 의원 회의는 친목 모임 성격이 짙지만, 이번에는 시종 팽팽한 긴장 속에서 양국 정부의 대리전을 방불케 하는 설전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대리전’ 치른 한·일 의원

한국 방미단이 3국 의원 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한·일 의원은 일본의 수출 제한 및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 우대국) 배제 조치와 관련해 회의 내내 날 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발언권을 얻기 위한 양국 의원 간 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방미단은 박경미·이수혁 더불어민주당, 김세연·최교일 자유한국당, 유의동·이상돈 바른미래당 의원으로 구성됐다. 회의는 한·미·일 3국의 경제·무역 현안과 대북 문제 등을 놓고 자유토론으로 진행됐다.

일본 측은 수출규제 강화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는 무관한 경제 조치라고 주장했다. 다만 강제징용 판결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합의한 협정을 정면 위반한 것이라고 한국 측에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일본 의원은 “한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 방미단은 일본의 수출규제는 명백히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고 반박하는 한편 역사 문제를 경제와 결부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맞섰다. 박경미 의원은 “일본 의원 중엔 ‘아베 신조의 분신’을 자처하는 것 마냥 도발하는 의원도 있었다”며 “일본 측이 먼저 거친 표현을 써 우리도 비슷한 수위로 맞받아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통제 시스템도 문제 삼았다.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일본산 전략물자가 한국을 거쳐 북한으로 몰래 흘러 들어갔다’는 일본 정부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우리 측은 일본 정부가 전략물자 밀수출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데다 전략물자를 잘못 관리해 북한으로 유출한 것은 오히려 일본이라고 반박했다. 또 한국은 전략물자 관리·통제와 관련한 모든 국제협약에 가입돼 있고, 유엔이나 제3의 검증기관을 통해 밀반출 의혹에 대해 검증받을 수도 있다고 일본 측을 압박했다.


미국 “다투지 않고 잘 해결했으면…”

당초 한국 방미단은 지난 22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가 채택한 ‘일본 정부의 보복적 수출규제 철회 촉구 결의안’을 3국 의원 회의에서 일본 측에 전달할 계획이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방미단 관계자는 “회의 분위기가 워낙 무겁다 보니 ‘박수를 치며 회의를 끝내자’는 우리 측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일본 의원도 있었다”고 전했다.

다만 일본 측에선 야당인 입헌민주당 의원들이 정부·여당과 사뭇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교일 의원은 “어떤 일본 야당 의원은 강제징용 문제와 경제 보복이 연관됐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고 말했다. 김세연 의원도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목소리도 일본 국회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고 했다.

양국 의원이 한 치 양보 없는 설전을 벌이자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운 미국 의원들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그동안 양국 갈등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정세균 전 의장은 “미국 의원들은 한·일 의원들이 너무 열을 올리면 찬물을 한 바가지씩 끼얹어 회의를 원만하게 이끌려 했다”며 “다만 논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아시아 전문 싱크탱크 맨스필드재단 관계자는 “한·일이 이런 문제를 갖고 다투면 불편한 것은 미국”이라며 “서로 다투지 않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방미단은 당초 회의가 끝난 뒤 류현진 LA 다저스 선수의 워싱턴 내셔널스전 선발 경기를 미·일 의원들과 함께 관람할 예정이었지만, 불필요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 일정을 취소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