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영의 논점과 관점] '규제 혁신'을 혁신하라

입력 2019-07-23 18:08
양준영 논설위원


[ 양준영 기자 ] ‘규제 샌드박스’는 영국이 원조다. 런던을 핀테크(금융기술)산업의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해 2015년 도입했다. 수석과학자문관을 지낸 마크 월포트가 의약품 임상시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 관련 규제를 면제·유예해주는 제도다. 용어는 모래통에서 유래했다. 아이들이 샌드박스 안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뛰어놀게 하되 안전에 위협이 발생하면 지켜보는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인 ‘모래통’을 용어로 쓴 까닭이다.

또 다른 규제가 된 '샌드박스'

규제 샌드박스는 시간적·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규제완화는 아니다. 산업별로 얽히고설킨 규제로 인해 변화를 신속히 따라가기 힘든 우리 현실에서 영국과 달리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는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법 개정을 통한 규제혁신이 무척 어려움을 방증한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났다. 총 81건의 과제가 승인됐다. 정부는 올해 목표(100건)의 81%를 달성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금융 분야가 37건, 산업융합 26건, 정보통신기술(ICT) 18건이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규제 탓에 사업화가 어려웠던 기업에는 규제 샌드박스가 ‘가뭄 속 단비’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6개월간의 성과를 들여다보면 우리 규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규제의 벽에 막힌 기업이 너무 많고, 정부가 이런 것까지 규제하고 있었나 씁쓸할 뿐이다. 손목시계형 심전도 측정기, 공유주방, 택시 동승 서비스 등 나름의 의미있는 성과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는 그냥 풀어도 될 규제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 2월 “이런 정도의 사업과 제품조차 허용되지 않아 규제 샌드박스라는 특별한 제도가 필요했던 것인지 안타깝다”고 했을 정도다.

게다가 원격의료와 승차공유 등 이해당사자 간 갈등이 첨예한 분야는 규제 샌드박스 논의에서 아예 제외됐다. 손목시계형 심전도 측정기는 원격의료 서비스라기보다 환자 진료를 돕는 보조적 도구다. 승차공유 서비스의 경우 택시와 연계된 자발적 동승 서비스는 관문을 넘었지만 렌터카 연계 모델은 보류됐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공무원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들어 심의를 거절하거나 보류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해당사자 간 합의된 서비스라면 기업들이 규제 샌드박스라는 ‘우회로’를 택할 이유가 없다. 정작 풀어야 할 핵심 규제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몇 건을 승인했다고 성과 운운하는 건 곤란하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없애도 그만인 것을 없애는 것은 진정한 개혁이 아니다”고 말한 것은 규제완화를 둘러싼 기업과 정부의 시각차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원격의료 등 핵심규제 손 못대

규제 샌드박스는 규제 혁신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한시적인 실험장일 뿐이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대표 정책으로 내세우면서 규제완화의 회피 창구로 활용해선 안 된다. 규제 샌드박스를 통과한 기업들이 임시허가 이후에도 사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정부가 일일이 심사해 승인하는 ‘관문 심사 방식’도 개선해야 한다.

속도가 생명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으로선 통과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만 허비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심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 공무원 편의에 따라 심의가 이뤄지는 것도 막아야 한다. 규제를 풀기 위해 마련한 제도가 또 하나의 규제가 돼선 곤란하다. 이러다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샌드박스에 넣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