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대신 실리"…특급호텔, 스타 셰프에 레스토랑 내주다

입력 2019-07-02 17:48
수정 2019-07-03 02:38
수익성 악화에 유행 뒤처져 '결단'

더플라자호텔, 레스토랑 4곳 운영
신창호·이준 등 외부 셰프에 맡겨
매출 일부 임대료로 받기로
시그니엘·앰배서더도 위탁


[ 안재광 기자 ] 한화가 운영하는 더플라자호텔은 2010년 대대적인 시설 공사를 했다. 이 호텔의 대표적 레스토랑 대부분이 이 시기 문을 열었다. 일식당 ‘무라사키’, 이탈리아 레스토랑 ‘투스카니’ 등이다. 이들 식당은 금세 명소가 됐다. 음식의 맛과 서비스에 서울시청 앞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입지도 한몫했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도 애용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급변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자 소비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결국 더플라자는 이들 레스토랑의 운영을 포기했다. 유행에 빠르게 반응하는 외부 젊은 셰프들에게 자리를 내주기로 했다. 한식당 ‘주옥’, 유럽식 파인다이닝 ‘디어와일드’ 등 한꺼번에 네 개 레스토랑이 2일 더플라자에서 문을 연 배경이다.


포시즌스·반얀트리 등도 자리 내줘

특급호텔 레스토랑은 그 호텔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특급호텔들이 속속 레스토랑 운영을 외부에 맡기고 있다. 자존심보다 생존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플라자는 지난 9년여간 무라사키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곳에 한식당 주옥을 열었다. 미쉐린가이드 1스타를 받은 신창호 셰프가 서울 청담동에 있던 레스토랑을 닫고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과 식초를 주된 재료로 활용해 한국의 사계절을 보여주는 요리를 선보일 계획이다.

디어와일드도 미쉐린가이드 1스타를 받은 이준 셰프의 세 번째 레스토랑이다. 옛 투스카니 자리를 이어받았다. 생면 파스타, 통오리 로스트 등이 주력 메뉴다. 이영라 셰프의 샴페인바 ‘르 캬바레 시떼’, 박준우 셰프의 디저트 카페 ‘더라운지’ 등도 더플라자 로비층과 지하에 들어선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외국인 손님이 많이 방문하기 때문에 이들 스타 셰프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자신의 요리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포시즌스도 일식당 ‘키오쿠’의 문을 닫고 지난 3월 퓨전 일식당 ‘아키라백’을 들였다. 포시즌스 12층에 있는 아키라백은 세계적인 셰프 아키라 백(한국 이름 백승욱)이 운영하는 곳이다. 한식을 기반으로 한 모던 일식을 주로 내놓는다.

남산에 있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에서 지난달 영업을 시작한 캐주얼 레스토랑 ‘페스타 바이 민구’도 스타 셰프에게 운영을 맡긴 경우다. 자체 운영하던 모던 한식당 ‘페스타다이닝’이 자리를 내줬다. 미쉐린가이드 2스타 레스토랑 ‘밍글스’의 강민구 셰프가 운영한다. 정통 유러피언 스타일을 변형해 창의적인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자존심 내려놓고 수익 챙겨

호텔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유명 스타 셰프에게 메인 레스토랑 자리를 내주는 주된 이유는 수익성이다.

호텔에서 레스토랑은 부대사업으로 분류된다. 호텔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긴 하지만 큰돈이 되지는 않는다. 한 호텔 관계자는 “뷔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호텔 레스토랑이 적자”라고 전했다. “호텔의 자존심 때문에 적자 운영을 한다”는 얘기다.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건비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만든 또 다른 배경이다. 레스토랑 적자가 너무 커져 견디기 어려워졌다. 호텔 레스토랑은 인건비 절감도 어렵다. 고품질의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선 숙련된 전문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플라자에 이날 문을 연 4개 레스토랑은 모두 매출의 일부를 임차료로 지급한다. 호텔에 안정적인 임대 수입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임대 형태로 운영하는 서울 시내 호텔 레스토랑은 시그니엘의 ‘비채나’, 그랜드앰배서더 풀만의 ‘홍보각’,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의 ‘타르틴’ 등이 있다.

외부에 맡기면 빠르게 변하는 음식 트렌드에도 반응할 수 있다. 호텔에 입점하는 셰프는 대부분 다양한 시도를 통해 창의적인 음식을 내놓는다. 최근 몇 년 새 국내에 젊은 ‘호캉스족’이 증가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젊은 호캉스족은 맛뿐 아니라 사진이 잘 나오는 음식을 좋아한다. 호텔이 운영하는 전통적 레스토랑은 이들의 선택을 받기가 힘들어졌다.

셰프와의 관계도 뒤집어졌다. 과거에는 스타 셰프를 호텔에서 직원으로 종종 영입했다. 셰프들이 호텔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요즘은 아니다. 호텔 셰프도 밖으로 나가 직접 레스토랑을 차리길 원한다. 이름이 알려지면 호텔 셰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수입도 더 좋다.

호텔들이 레스토랑을 외부에 맡기는 사례가 많아지자 대기업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현대그린푸드는 레스토랑 위주 사업을 전담하는 별도의 팀을 신설했다. 2013년 경기 양평의 블룸비스타를 시작으로 쉐라톤 서울 팔래스강남호텔, 대구의 그랜드호텔, 강원 정선의 라마다앙코르, 대전 라마다앙코르 등 5개 호텔 내 레스토랑을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