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알아서 굴려주는 퇴직연금…勞 반발에 '반쪽짜리' 되나

입력 2019-07-02 17:38
수정 2019-07-03 03:51
與 특위 '디폴트옵션' 도입안
고용부·국회 환노위서 '후퇴'


[ 이호기/강영연 기자 ]
‘쥐꼬리 퇴직연금 수익률’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자본시장활성화특별위원회가 추진해온 ‘디폴트 옵션’(자동투자 제도) 도입안이 ‘반쪽짜리’가 될 위기에 놓였다. 사실상 무산된 것으로 확인됐다. 디폴트 옵션은 근로자가 따로 요구하지 않으면 금융회사가 자금을 주식과 펀드 등에 투자해 알아서 굴려주는 퇴직연금 운용 방식이다.

2일 고용노동부와 국회 등에 따르면 고용부는 노사 합의로 디폴트 옵션을 결정할 때 주식형 주식혼합형 등 실적배당형 상품뿐만 아니라 원리금보장형까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이달 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는 애초 민주당 특위가 건의한 주식형 상품에 자동 투자하도록 한 취지의 원안에 비해 상당히 후퇴한 것이라는 평가다. 원리금보장형을 선호하는 문화가 강한 탓에 노사 합의로 실적배당형 상품을 디폴트 옵션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개혁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주식 자동 투자에 대한) 노동계 거부감이 워낙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미국 호주 등 선진국들은 퇴직연금을 원금보장형 상품보다는 주식 등에 적극 운용해 높은 수익률을 거두고 있다. 작년 말 기준 한국 퇴직연금 규모는 190조원으로 이 가운데 172조원이 원리금보장형에 가입하고 있어 연 1% 안팎의 쥐꼬리 수익률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퇴직연금 '쥐꼬리 수익률' 다 불만인데…주식투자 안된다는 노동계

퇴직연금 가입자의 자금을 금융회사가 알아서 굴려주는 ‘디폴트 옵션(자동투자 제도)’ 도입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한 것이다. 민주당 내 자본시장특별위원회(위원장 최운열 의원)가 주도했다. 대부분 가입자가 한번 가입해 놓고 사실상 방치해 정기예금 금리보다 못한 연 1% 안팎 수익률에 허덕이고 있는 퇴직연금 제도를 수술하자는 게 취지였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여당 특위안에 ‘퇴짜’를 놨다. 그 배경에는 노동계 반발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용부 관계자는 2일 “노동계는 일선 노조 조합원의 미래 퇴직금을 주식 등에 투자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다”며 “퇴직연금 제도의 당사자인 노조 측 거부감이 큰 상황에서 정부가 무작정 밀어붙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노조 반발에 좌초한 여당 특위안

고용부는 여당 특위안 대신 노사 합의로 예금 등 원금보장 상품을 디폴트 옵션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정부안대로라면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평가를 내놨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예금으로 자동 운영되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호주에서는 디폴트 옵션을 주식혼합형 상품인 ‘마이슈퍼(MySuper)’ 하나로 통합 운영하고 있다. 1992년 ‘슈퍼애뉴에이션’이라는 이름의 퇴직연금법을 도입한 뒤 펀드에만 투자하도록 강제한 제도 덕분에 회사는 근로자 임금의 9%를 적립하고, 이를 근로자가 원하는 펀드에 투자해 은퇴할 때까지 운용해야 한다.

미국은 디폴트 옵션으로 ‘생애주기형펀드(TDF)’ ‘자산균형펀드(BF)’ ‘맞춤형자산관리(MA)’ ‘채권투자형(CPF)’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 현재 마련된 정부안과 비슷하지만 주식형을 선택하는 비율이 60%에 육박한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은퇴연구소장은 “주식 투자가 활성화돼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노사 합의에만 맡겨두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호주와 마찬가지로) TDF 등 표준화된 상품이 디폴트 옵션으로 들어오도록 강제해 연금 수익률과 함께 펀드 및 주식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원리금보장형이 오히려 불리”

오히려 원리금보장형 상품이 근로자 노후에 불리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사장은 “20~30년 뒤 원금에 쥐꼬리만 한 이자를 받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를 반대하는 건 스스로가 ‘금융 문맹’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1.01%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1.5%)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5년과 10년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수익률은 각각 1.88%, 3.22%에 불과하다.

원금보장형 상품으로의 쏠림이 낮은 수익률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에서 원금보장형에 투자한 비중은 90.3%에 달한다. 금융상품으로 들어간 돈은 전체의 9.7%에 불과했다.

김은혜 NH투자증권 연구원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예금금리가 연 3~4%대로 높은 편이라 수익률이 높았다”며 “저금리 시대에는 예금에만 투자해선 연 1%대 수익률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해외에선 주식 투자가 필수”

물가상승률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가 필수라는 주장도 나온다.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은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약 30~40%) 정도는 가져가야 물가상승률 이상의 의미있는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미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는 퇴직연금에 부동산, 인프라, 주식 등 다양한 투자 방식을 사용한다. 호주퇴직연금협회(ASFA)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호주의 퇴직연금에는 49%의 주식(비상장주식 포함)을 담고 있다. 현재 운용 규모만 2조달러가 넘고 투자처도 인프라(5%), 채권(22%)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401K 등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 역시 펀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대표적 상품이 TDF다. 미국은 퇴직연금 전체 가입자의 3분의 2가 TDF에 가입해 있다.

박진 NH투자증권 100세시대 연구소장은 “지난 5년간 평균 수익률이 7~8% 정도”라며 “중위험·중수익 상품으로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디폴트 옵션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일정 기간 별도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업자가 퇴직연금 자산을 알아서 굴려주는 제도. 안정형 중립형 공격형 등 연금 사업자가 마련한 투자상품 가운데 노사가 미리 결정한 방법으로 운용한다.

이호기/강영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