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성-예술성 충돌
한섬-스티브J&요니P, 삼성물산-정구호
코오롱-석정혜·김재현·이보현 모두 '이별'
[ 민지혜 기자 ] 한섬은 수십 년간 여성복 1위 자리를 다른 회사에 내준 적이 없다. 2000년 이후 최근까지 패션의 흐름이 급격히 변해도 그 자리를 지켰다. 반면 과거 한국의 대표 패션기업이던 제일모직(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 차이에 대해 한섬을 키워 현대백화점에 매각한 정재봉 전 회장은 “한섬은 철저히 디자이너 중심의 조직”이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들이 막강한 파워가 있어 패션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대기업들의 복잡한 의사결정 체제와는 달랐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유명 디자이너들이 잇따라 패션 대기업을 떠나고 있다. “패션은 제조업이 아니다”고 외치면서.
변해가는 한섬?
가수 이효리가 자주 입어 2030세대 사이에서 유명한 스티브J&요니P. 이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정혁서·배승연 부부다. 이들은 최근 자신들이 만든 브랜드를 남겨둔 채 현대백화점에 인수된 한섬의 자회사 현대G&F를 떠났다. “내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인스타그램에 남겼다. 자신들만의 새로운 브랜드를 예고한 것이라는 관측이다. 한섬은 “계약기간 만료에 따른 자연스러운 퇴사”라고 밝혔다. 하지만 패션업계에서는 “대기업 안에서 디자이너가 오래 일하긴 어려운 구조”라는 반응이 많이 나온다. 한섬도 현대백화점에 인수된 뒤 기업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정혁서 배승연 디자이너는 영국 패션스쿨 센트럴세인트마틴에서 공부하고 2006년 처음 브랜드를 선보였다. 해외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뒤 국내에 들어왔고 2014년 SK네트웍스 패션부문이 스티브J&요니P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기업에 처음 발을 들였다.
대기업을 떠난 것 자체가 큰 화제가 됐던 디자이너는 정구호 씨다. 2003년 자신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를 제일모직에 매각한 뒤 10년간 함께 일했다. 이 기간 구호는 글로벌 브랜드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양측은 2013년 결별했다. 이 브랜드가 ‘정구호 없는 구호’가 된 것은 삼성과 정구호 씨 간 갈등 때문이었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FnC부문도 비슷하다. 석정혜 디자이너의 핸드백 브랜드 ‘쿠론’을 2010년 인수했지만 2016년 석 디자이너가 신세계인터내셔날(SI)로 적을 옮겼다. 석 디자이너는 샘플까지 제작했지만 SI가 핸드백 브랜드를 출시하지 않자 1년8개월 만에 SI를 떠났다. 석 디자이너는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었다. 핸드백 브랜드 ‘분크’는 백화점에서 유치에 나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코오롱FnC가 인수한 여성복 ‘쟈뎅드슈에뜨’의 김재현 디자이너도 5년 동안 코오롱FnC에서 근무하다가 2017년 말 퇴사했다. 올해 4월 신규 여성복 브랜드 ‘에몽’을 선보였다. 슈즈 브랜드 ‘슈콤마보니’를 만든 이보현 디자이너는 2012년 코오롱FnC에 들어갔다가 지난해 LF로 옮겼다. 삼성물산 패션부문과 코오롱FnC가 고전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기업, 디자이너 뺀 브랜드만 운영
대기업들은 처음에는 야심차게 디자이너 브랜드를 인수한다. “엇비슷한 기성복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를 선호하는 젊은 층을 사로잡겠다”는 게 목표다. 이 과정을 거쳐 꽤 오래 한 지붕 아래서 일한 디자이너도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잇따라 ‘결별’을 택하는 것은 대기업과의 문화 충돌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기업은 이익 극대화를 위해 ‘상품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반면 디자이너는 차별화된 브랜드 정체성과 ‘예술성’을 중시한다. 퇴사를 선택한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배운 건 많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나만의 열정을 담은 내 브랜드를 하기 위해 나간다”고 입을 모은다.
또 부딪치는 부분은 일하는 스타일이다. 디자이너들은 대개 자유분방하다. 의사결정도 빠르다. 이거다 싶은 ‘촉’이 오면 곧장 실행에 옮긴다. 하지만 대기업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기업은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하고, 비용 절감은 거의 모든 대기업 조직의 지상과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브랜드로 가는 길 ‘요원’
국내 디자이너와 패션 기업의 결별은 오랜 역사와 스토리를 지닌 ‘롱런’ 브랜드가 나오는 것을 막고 있다. ‘샤넬’ ‘에르메스’ ‘디올’ 등 수십 년에서 100년 가까이 된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창업자인 디자이너가 오래 근무할 뿐 아니라 이후 영입한 디자이너들도 브랜드 정체성에 맞는 제품을 장기간 선보인다. 대표적 사례는 올해 타계한 카를 라거펠트다. 그는 1982년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뒤 37년 동안 샤넬의 수장 자리를 지켰다. 샤넬이 13조원에 달하는 연 매출을 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카를 라거펠트라는 대표 디자이너가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