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종 사장, 자본시장 '스타'되기 거부한 외유내강 CEO

입력 2019-07-02 16:59
수정 2019-07-03 02:18
CEO 탐구
고원종 DB금융투자 사장

"숨겨진 진주 발굴해 키우는 게 증권맨 소명"


[ 김동현 기자 ]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외환위기가 한국을 강타한 1998년 10월.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은 이 같은 제목의 A4용지 4장짜리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엔 대우그룹이 자금조달원이 없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증권시장은 술렁거렸다. 그러면서도 투자자들은 ‘설마 대우가…’라며 반신반의했다. 이듬해 8월 대우그룹 12개 계열사는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을 결정했다. 당시 이 보고서를 쓴 애널리스트가 고원종 DB금융투자 사장이다.


파장 불러온 대우그룹 보고서

고 사장은 1958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은행장을 지낸 선친(고태진 전 조흥은행장)의 영향으로 학생 때부터 금융인을 꿈꿨다. 고 사장은 “예금, 대출 등 은행 업무가 금융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어서 부모님은 은행권에서 일하길 원하셨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고등학생 때 주식투자를 시작했을 정도로 자본시장의 매력에 푹 빠져 증권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했다.

첫 직장은 1982년 입사한 대우그룹 계열 동양투자금융이었다. 이후 노무라·ABN암로 등 외국계 증권사에서 투자전략 담당 애널리스트로 활약했다. 대우그룹 보고서는 그가 ‘대우그룹 출신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였기 때문에 쓸 수 있던 작품이었다.

이 보고서를 발표한 뒤 그는 자본시장에서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디어 노출 등을 극도로 자제하며 조용히 커리어를 쌓았다. 2010년엔 DB금융투자(옛 동부증권) 사장이 됐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경영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업무상 술자리가 있을 때도 술은 마시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먼저 일어난다. 한국 사회에서 ‘사업엔 필수’란 인식이 강한 골프도 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이끄는 DB금융투자는 지난해 사상 최대 순이익(631억원)을 냈다. 2017년(153억원)에 비해 4.1배 급증한 금액이다. “겸손하면서도 철저하게 내실을 추구하는 외유내강형 최고경영자(CEO)”라는 게 그를 잘 아는 주변 인사들의 평가다.

기업금융에 애착

DB금융투자 CEO가 된 뒤 그는 틈만 나면 “소명의식을 갖고 일하자”고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고 사장이 생각하는 ‘증권맨’의 소명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는 “성장 잠재력이 있지만 자본 확충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투자자를 연결해 수익을 내는 기업금융에 애착이 크다”고 설명했다. 최근 DB금융투자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기업공개(IPO) 주관 사업에 이런 그의 소신이 배어 있다.

DB금융투자는 바이오 기업 셀리버리의 주관사로 참여해 지난해 말 ‘1호 성장성 특례상장’을 마무리지었다. 성장성 특례상장은 기업의 이익 규모에 상관없이 주관사가 재량으로 성장성을 평가해 상장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증권사로선 상장 후 6개월 동안 일반 청약자에게 풋백옵션(환매청구권)을 부여해야 하는 리스크(위험)가 있다. 투자자들이 풋백옵션을 행사하면 상장 주관사는 공모가의 90% 가격에 이를 매입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제도 도입 후 한동안 대형 증권사들도 선뜻 참여하지 않았다. DB금융투자에서도 셀리버리 성장성 특례상장 주관사 참여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그는 “상장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더라도 성장 잠재력이 높다면 과감하게 주관을 맡아 자금을 공급하는 게 증권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임직원을 설득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셀리버리는 기관투자가 대상 수요예측(사전청약)에서만 699 대 1의 경쟁률을 올리는 ‘대박’을 쳤다. DB금융투자는 이 IPO 한 건으로 10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우수 인재에 패자부활 기회

고 사장은 증권업계에서도 손꼽히는 장수 CEO다. 2014~2015년 유동성 위기에 몰린 동부그룹(현 DB그룹)이 구조조정에 들어가는 등 풍파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맡은 DB금융투자는 결국 살아남았다.

증권가에선 고 사장이 적재적소에 우수 인력을 충원해 회사 실적을 끌어올리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올초엔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 주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구조화금융 전문가인 황세연 본부장을 기업금융본부장에 앉히기도 했다.

규모가 작은 중견 증권사 CEO로서 그는 우수 인재를 발굴하는 데 독특한 노하우가 있다. 일단 겸손하면서 업무 전문성이 높은 인재 영입이 1순위 목표다. 그는 “자기가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인재 중엔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많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현업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우수 인력들을 찾는 데 주력한다”고 말했다.

능력이 있는데도 승진 경쟁에서 밀린 대형 증권사 출신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로 낙마한 증권맨들을 적극적으로 영입 대상에 올려 놓는다. 고 사장은 “큰 고비를 겪은 인재들에게 ‘패자부활’의 기회를 주자는 의미도 있다”며 “다른 회사에서 부하 직원의 불법 금융거래에 대해 책임을 지고 퇴사한 관리자가 DB금융투자에 입사한 뒤 승진을 거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가정이 최우선’…매년 사내 가족행사도

고 사장은 매일 아침 출근해 생일을 맞은 직원에게 축하 문자를 직접 보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취임 초기엔 “진짜 사장님 맞느냐. 누구시냐”고 의심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직원들이 사장에게 감사 답글을 남기는 등 익숙한 사내 문화가 됐다. 문자를 보내기 시작한 지 5년이 지나면서 고 사장의 생일에도 직원들의 축하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년 여름 ‘패밀리 플러스(+)’란 이름의 사내 가족행사도 열고 있다. 직원 자녀들이 부모가 일하는 곳을 방문해 구내식당에서 삼계탕을 먹으며 다양한 공연과 오락을 즐기는 행사다.

지난해에는 마리오네트 인형극 관람과 인형, 가족액자 만들기 체험 등 행사를 열었다. 그는 “동부그룹 구조조정 시기에 대구지점의 한 직원에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문제가 잘 해결됐으면 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며 “직원과 가족이 모두 행복한 직장을 만드는 게 CEO로서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고원종 DB금융투자 사장 프로필

△1958년 울산 출생
△1977년 서울 성동고 졸업
△1982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82년 동양투자금융 입사
△1984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1988년 루이지애나주립대 경영대학원 경영학 박사
△1991년 노무라증권 이사
△1999년 ABN암로증권 상무
△2000년 SG증권 한국대표
△2003년 DB금융투자(옛 동부증권) 부사장
△2010년~ DB금융투자 사장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