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길의 경제산책] 공기업은 기업 아닌가…수천억 적자나도 채용 늘리면 '양호'

입력 2019-07-02 11:05
수정 2019-07-02 11:10


공기업은 기업일까요 아닐까요. 우문(愚問)입니다만, 요즘 답을 헷갈리게 만드는 일이 자꾸 생기고 있습니다. 공기업을 ‘사회단체’ 쯤으로 치부하는 사례가 많아서지요.

공기업은 당연히 기업입니다. 심지어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강원랜드 한국전력기술 등은 국내외 증시에서 거래되는 상장기업니다. 외국인 투자 비중도 꽤 높습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보면, “기업은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한다”는 개념이 무색해집니다. 재무구조가 형편없이 나빠진 공기업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나마 탄탄한 공기업은 다른 이유로 최악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동서발전은 이번 경영평가에서 ‘양호(B)’ 등급을 받았습니다. 모두 작년 순손실을 기록했고, 수 년만에 최악의 실적을 낸 곳들입니다. 심지어 매년 수 천억원씩 수익을 내다 작년 적자로 돌아선 한국중부발전은 우수(A) 평가를 받았지요. 반면 그나마 재무구조가 탄탄한 한국전력기술, 한전KPS 등은 미흡(D) 등급을 받아 기관장에게 경고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는 공기업 직원들로선 최대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1년 내내 경영평가 관리를 전담하는 부서를 별도로 둘 정도이지요. 평가 결과에 따라 전체 직원의 1년 성과급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기업이 수 천억~수 조원의 적자를 내도 좋은 평가를 받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새 정부가 공기업 평가에 ‘다른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입니다. 수익성이나 재무구조 비중을 확 낮추고 ‘사회적 기여’, ‘친환경’ 등 정부 시책을 잘 따랐는지를 중점 평가했습니다. 예컨대 경영실적(재무) 항목을 절반으로 줄인 데 이어 부채 점수의 경우 평가 항목에서 아예 빼버렸습니다. 빚을 늘린다고 해서 나쁜 점수를 받지 않는 겁니다. 재무 구조는 공기업 평가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대신 사회적 가치 항목에 대한 점수를 대폭 확대했습니다. 특히 채용을 늘릴수록,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많이 전환할수록 높은 점수를 받도록 했지요. 사회적 가치와 같은 모호한 ‘비계량’ 항목이 대폭 확대되면서 공기업들은 객관적인 지표 대신 평가자 또는 정부만 쳐다보게 됐습니다. 일각에선 “회사가 망가지든 말든 일단 채용만 늘리고 보면 좋은 평가를 받아 성과급을 챙길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얘기합니다.

정부는 재무건전성 등 객관적 지표를 지금보다 더 낮추고 ‘사회적 가치’ 점수를 높이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공기업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정책 코드 맞추기’ 움직임이 일고 있구요.

공기업은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적자가 누적돼 재무구조가 부실화되면 누군가 메워야 합니다. 공기업 주인이 최종적으로 국민인 만큼 결국 전체 국민들이 분담해야 할 겁니다. 다만 그 책임을 지는 게 현 정부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데 딜레마가 있습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