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씨 갤러리 현대 개인전
[ 김경갑 기자 ]
1630년대 경제대국 네덜란드에는 이슬람 세계와 신대륙, 아시아 지역에서 수입된 사치품들에 대한 취향이 널리 퍼져 있었다. 희귀하고 값비싼 꽃들은 부유층의 주요 수집 대상이었다. 터키 원산의 원예식물인 튤립은 사재기까지 가세해 꽃 한 송이 가격이 현재 환산 가치로 8만7000유로(약 1억6000만원)까지 폭등했다. 상업적 화가들은 화려하고 예쁜 꽃 그림을 쏟아내며 폭발적인 꽃 수요를 거들었다. 일부 화가들은 꽃 정물화를 통해 현세적 아름다움과 쾌감이 한시적이고 덧없다는 점을 일깨워주려고 했다. 부유층의 이런 사치의 전유물로 탄생한 정물화는 장 시메옹 샤르댕, 빈센트 반 고흐,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로 이어지며 미술 장르로 ‘우뚝’ 섰다.
꽃 정물화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현대미술로 재현하는 이색 전시회가 마련됐다. 7월 28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30대 서양화가 김성윤 씨(사진)의 개인전 ‘어레인지먼트(Arrangement·꽃꽂이)’이다. 국민대 미대를 졸업한 김씨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합하는 회화적 테크닉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주제로 잘 알려져 있다. 올림픽 출전 선수와 젊은 화가들을 소재로 다룬 그의 작품은 주변의 이미지나 형태를 차용한 기법으로 국내외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씨는 이번 전시에 서로 다른 소재를 임의적으로 결합한 꽃 그림 47점을 풀어놓았다. ‘화가가 꽃을 꽂는 세 가지 방법’이란 큰 틀 아래 17세기 정물화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19세기 마네가 말년 병상에서 그린 꽃 정물을 흑백으로 재현한 작품, 동시대 미술에서 꽃 그림 의미를 해석한 작품을 걸었다. 물감이라는 물질이 꽃잎으로 변하는 감각적 변화의 순간을 빠르게 잡아내 기존 정물화의 통념을 살며시 뒤집은 작품들이다.
지난 29일 전시장에서 만난 김씨는 “17세기 부유층으로부터 각광받던 정물화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꽃 그림을 내보인다”고 말했다. 마네의 꽃 그림을 재현한 작품들은 일체의 색을 배제하고 흑백 톤으로 정물화의 독특한 기법을 살려냈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꽃 장식물처럼 묵시록적인 정서가 강하게 풍겨난다. 작가는 “물감을 흑백 톤으로 바꿔 마네를 오마주한 것”이라며 “화전민이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태우듯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브뤼헐과 얀 반 허이섬이 구축한 꽃 정물화의 기법과 양식을 차용한 작품에서는 당시 사회 풍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개화 시기가 다른 꽃들을 재배열하고, 현대 도예 작품을 화병으로 활용해 당시 네덜란드의 거품 경제 속 중산층의 허영심을 들춰낸다. 화훼시장에서 꽃을 고르고, 꽃꽂이를 통해 대상을 임의적으로 결합한 정물화도 눈길을 끈다. 화병으로 사용된 식료품 유리병 로고의 색상으로 액자를 채우고, 아래 부분에는 해당 로고를 인쇄해 넣었다. 보편적 표상이나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브랜드 로고를 전면에 내세우며 꽃 정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전도를 은유했다.
김씨는 “현대의 이미지나 형태를 빌려 사실적으로 그리는 과정을 반복했고, 여기서 발견되는 양상과 패턴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했다”며 “익숙한 이미지에서 시작해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