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반도체·OLED 부품 한국 수출 규제"

입력 2019-06-30 17:52
수정 2019-07-01 00:39
산케이신문 보도…4일부터
韓 징용소송 관련 '경제보복'


[ 서욱진/좌동욱 기자 ]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경제 보복에 나설 것이라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7월 4일부터 TV 스마트폰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부품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제조 과정에 들어가는 리지스트와 에칭 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세 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할 것이라고 30일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가 징용 배상 소송과 관련된 사실상의 ‘보복’이며, 일본 정부가 7월 1일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90%, 에칭 가스는 약 70%를 일본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 대부분이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또 첨단 재료 등의 수출 허가신청을 면제해주는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본 업체들은 8월 1일부터 해당 품목을 한국에 수출할 때 건별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산케이는 이 규제가 강화되면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 대표 기업들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업계도 일본 정부의 보복이 가해지면 반도체, 스마트폰 생산 등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을 통보받은 바 없다”며 “보도의 진위를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日 소재 없인 반도체·스마트폰 못 만드는데…" 기업들 '초비상'

일본 정부가 반도체, 스마트폰, TV에 활용되는 핵심 소재의 수출을 규제할 것이라는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가 나온 30일 국내 관련 기업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기업들은 “언론 보도가 사실이냐”,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민간 기업 간 거래를 규제할 수 있냐”며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들에 문의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기업들은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가능성’이 거론된 지난해 말부터 재고를 늘리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 주요 제품 생산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세계 시장에 미치는 후폭풍 등을 고려할 때 일본 정부가 ‘협박성 카드’를 흘린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日 수출규제 따른 국내 피해는

이날 산케이가 거론한 수출규제 품목은 △감광액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다. 감광액은 반도체 핵심 제조 공정 중 하나인 웨이퍼 위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photo) 공정에 쓰이는 필수 소재다. 고순도 불화수소는 반도체 회로의 패턴을 형성하는 식각(etching)과 세정(cleaning) 공정에 활용된다. 산케이에 따르면 전 세계 감광액 수요의 90%를 신에쓰화학, JSR, 스미토모 등 일본 업체들이 생산하고 있다. ‘에칭가스’로 불리는 고순도 불화수소는 스텔라, 모리타 등 일본 업체들이 세계 수요의 70%를 담당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두 가지 재료 중 하나만 없어도 D램, 낸드플래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국내 대표 반도체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불소 처리를 통해 열 안정성과 강도 등의 특성을 강화한 폴리이미드(PI) 필름이다. 스마트폰과 TV용 플렉시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을 생산할 때 광범위하게 쓰인다. 일본 정부가 이 소재 수출을 규제하면 세계 TV용 OLED 패널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LG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용 OLED 패널 1위 업체인 삼성디스플레이가 타격을 받는다. OLED 패널 공급이 막히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과 LG전자의 OLED TV 사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산케이가 “수출규제가 강화되면 반도체 대기업인 삼성전자와 박막형 고정밀 TV에서 앞서가는 LG전자 등 한국 간판 대기업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한 이유다.

한국 정부 압박용 카드?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업계는 지난해 말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일본의 경제 보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검토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일본 정부가 한국으로 수출하려던 고순도 불화수소 물량을 불승인했다가 이틀 만에 허가하는 일이 발생한 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경영진은 대응책 마련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사건은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이 아니라 서류 미비에 따른 행정절차상 문제였다”며 “하지만 그 이후 대비책의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일부 업체들은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재고를 늘리고 중장기적으로 국산화율을 높이는 전략 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뚜렷한 해법이 없어 답답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선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가능성 거론이 ‘단순 위협용’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세계 반도체, 휴대폰, TV 시장에 미치는 후폭풍을 감안할 때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조치를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70% 이상이다. 낸드 시장 점유율도 60%가 넘는다. 두 업체가 D램과 낸드 생산을 멈추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일본 기업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감광액과 고순도 불화수소를 제조하는 일본 기업들은 한국 기업 외 다른 고객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fluorine polyimide. 불소 처리를 통해 열 안정성, 강도 등의 특성을 강화한 폴리이미드(PI) 필름. 플렉시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제조에 필요하다.

■고순도 불화수소

hydrogen fluoride. 독성이 강한 부식성 기체. 반도체 제조공정 중 회로의 패턴을 형성하는 식각(etching)과 세정(cleaning) 공정에 활용.

■감광액

photoresist. 빛에 노출되면 화학적 성질이 변하는 물질. 반도체 제조공정 중 웨이퍼 위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photo) 공정에 쓰인다.

서욱진/좌동욱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