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 성장에 치중했던 ESS산업
화재조사 결과 축적한 데이터를
재도약 자양분 삼아 시장 개척을
한민구 <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
세계 일류 기업들은 시장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위기를 겪는다. 양적 성장에 집중하다 보니 안전, 품질 등 기본을 등한시한 탓이다.
일본 도요타자동차도 이런 위기를 겪었다. 도요타는 2008년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자동차 판매량에서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 발생한 렉서스 급발진 사고로 1000만 대 이상 리콜했다. 도요타식 극한 원가 절감이 결함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도요타는 ‘기본과 원칙’이라는 값진 교훈을 얻은 대가로 비싼 수업료를 지급했다. 이를 계기로 고객 신뢰를 회복한 것은 물론 지금도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한국 에너지저장장치(ESS)산업도 퍼스트 무버로서 진통을 겪고 있다. ESS는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 설비다. 야간에 남는 전기를 비축했다가 낮에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태양광, 풍력 등을 통해 생산한 전기를 저장하는 역할도 한다. 전력을 효율적으로 생산·소비할 수 있는 장점에다 신재생에너지 확대 기조가 더해져 세계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정부는 세계 최고의 리튬이온 배터리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ESS 시장을 선점한다는 전략 아래 2014년부터 대대적인 육성 정책을 펼쳤다. 2013년 30개에 불과하던 ESS 사업장은 작년 말 1490개로 늘어 시장 점유율 1위가 됐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급격한 양적 성장이 한계에 봉착한 것일까. 지난 2년 사이 발생한 23건의 화재 사고로 관련 산업은 위기를 겪었다. 업계의 신규 수주가 끊겼고 투자자들은 가동 중단으로 손해를 봤다. 다행히 정부가 5개월간 조사 끝에 화재 원인을 발표했다. 안전강화 대책과 함께 산업 지원 방안도 내놨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ESS산업의 미래는 여전히 희망적이다.
ESS 안전기준에 대해선 선진국 역시 정비 중이다. 국제표준은 2020년에나 제정될 예정이다. 작금의 시련은 우리가 표준도, 안전기준도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온 퍼스트 무버로서 겪은 성장통이다. 선진국이 걸어간 길을 빠른 속도로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지언정 선진국을 넘어서지 못한다. 퍼스트 무버는 숱한 시행착오를 경험하지만 이를 자산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다.
첫째, ESS 사고 원인 조사에는 사고조사위원회 구성원 외에 국내 시험연구기관 연구원들이 참여했다. ESS 안전과 사고 조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인력을 확보하게 됐다.
둘째, 실증시험 등을 통해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는 ESS 국제표준을 정할 때 우리 기술과 경험을 우선 반영하도록 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표준은 데이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표준의 선점은 향후 세계시장 지배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 화재 원인을 토대로 ESS 제조, 설치, 운영에 이르는 전 과정의 안전관리를 강화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ESS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사고조사위가 밝힌 화재 원인은 ESS 안전엔 지극히 기본적인 사항이다. 기본과 원칙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축적한 소중한 자산을 바탕으로 재도약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몇 안 되는 퍼스트 무버, ESS산업은 지속 성장해야 한다. 이번 사고의 교훈이 ESS를 넘어 모든 산업계로 확산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