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 원동력 '국가주의'…영미式 진화 아닌 포퓰리즘으로 퇴보

입력 2019-06-21 18:08
수정 2019-06-22 12:19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8) 한국형 시장경제체제

韓, OECD 중 규제 가장 강해
외환위기 이후 정부 개입 되레 심화



선진적 두 유형

시장경제체제는 나라마다 법, 제도, 문화의 차이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한다. 영국과 미국을 모델로 하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는 개인 간 자유계약을 핵심원리로 한다. 사용자와 종업원은 계약에 의한 위계 관계다. 사용자는 필요에 따라 종업원을 쉽게 해고할 수 있다. 노동시장이 매우 유동적이어서 해고된 종업원은 다른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기술과 숙련의 형성은 기업과 산업의 외부에서, 주로 대학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노동시장이 유동적이고 통합적이다. 기업의 투자자금은 주식 발행을 통한 직접금융의 경로로 조달된다. 기업의 경영은 주주에 대한 배당을 중시하며, 이에 장기간의 대규모 설비투자보다 단기간의 혁신적 기술투자를 선호한다. 지난 세기에 걸쳐 세계 자본주의를 선도한 주요 혁신은 거의 미국경제에서 일어났다.



다른 한 가지 선진적 유형은 독일을 모델로 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다. 여기서는 단체 간 협약이 경제체제의 핵심원리다. 사용자와 종업원의 관계는 협약에 기초한 공동체 관계다. 사용자는 불황이 닥쳐도 종업원을 쉽게 해고할 수 없다. 기술과 숙련의 체계가 기업 또는 산업에 따라 달라 해고된 종업원이 다른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과 숙련의 형성은 기업과 산업 내부에서 이뤄진다. 기업의 투자자금은 은행의 장기융자를 통한 간접금융으로 공급된다. 은행은 기업의 내부 정보를 공유하면서 기업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다. 조정시장경제는 반복적인 실험과 시행착오로 기술과 숙련이 조금씩 쌓이는 기계, 금속, 화학공업에서 큰 경쟁력을 갖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는 자유시장경제 그룹에 속한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일본은 조정시장경제 그룹에 속한다.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는 그 게르만적 배경에서 조정시장경제에 속하지만 자유시장경제의 장점을 많이 수용해 독자의 선진적 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후진적 두 유형

OECD의 나머지 국가로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 멕시코, 한국 등은 위의 두 유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들 나라의 공통된 특징은 국가가 경제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자본과 노동의 배분을 좌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형과 조정형 시장경제에서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로 분리돼 있다. 정부의 역할은 대개 시장경쟁의 규칙을 확립하고 위반자를 엄하게 단속하는 데 국한돼 있다. 비상한 위기를 맞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현상에 그칠 뿐이다.

프랑스 등 OECD 2등 국가는 사회의 관료제적 편성과 통제가 강했던 그 자신의 특별한 역사적 전통에 구애돼 있다. 그 이유로 프랑스의 시장경제는 흔히 국가주의(statism)로 규정된다. 프랑스와 달리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 지중해 국가는 대중주의(大衆主義·populism)의 특질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정치와 관료제의 근대화가 지체돼 집권 정당이 자신을 지지한 지역, 조합, 계층에 정부 재정으로 보상을 행하는 저급한 양태를 보인다. 여기서는 세계 경제를 선도할 만한 혁신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지역 국가경제가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은 자연과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농축산업과 관광산업의 자원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체제는 ‘국가주의’

한국의 경제체제는 프랑스형 국가주의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문화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다. 이전 연재에서 소개한 대로 1948년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 나라 헌법을 제정할 때 ‘경제’라는 제목의 장(章)을 정해 국가의 경제개입을 정당화했다. 헌법에 ‘경제장’을 두는 것은 공산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경제장은 주요 자원, 산업, 대외무역을 국·공유로 관리하며, 민간의 사기업은 필요에 따라 국·공유로 이전할 수 있으며, 사기업의 노동자는 기업 이윤을 균점한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국가사회주의적 특질은 1962년 제5차 헌법 개정에 이르는 동안 크게 불식됐다. 그 대신 자유기업주의가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그럼에도 이후 격동의 정치사에 편승해 그 같은 특질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강화돼왔음이 저간의 역사적 추세였다.

현행 헌법 119조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뒤이어 국가는 농업과 어업을 보호·육성해야 하며, 지역경제를 육성해야 하며,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하며, 농수산물의 유통구조를 개선해야 하며,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해야 하며, 소비자보호운동은 보장해야 하며, 대외무역을 육성해야 하며, 과학기술의 혁신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한다고 함으로써 정부의 대기업 규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행 헌법은 국가에 의해 보호·육성되거나 통제되지 않은 경제주체는 단 한 범주도 존재하지 않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후대의 경제사학자는 건국 이후의 한국 경제를 전형적인 국가사회주의라고 정의할 터이다.

‘영미형으로 진화’는 착시

시장경제체제의 유형은 고정적이지 않다. 세계경제 여건의 변화에 따라 또는 정치 지도력의 특별한 선택에 의해 다른 형태로 이행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프랑스 경제는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던지고 영미형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경제도 그렇다는 진단이 가끔 몇몇 경제학자에 의해 내려지곤 하는데,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영미형으로 진화를 이끌 만큼 개인주의의 법, 제도, 문화가 성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제개입은 지난 20년간 점점 강화됐다.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의 건수는 2000년 6912건에서 2013년 1만4796건으로 증가했다. 정부가 펼쳐 놓은 규제의 그물망은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2013년 OECD는 상품시장에 관한 정부 규제의 강도를 국제적으로 비교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OECD 33개국 가운데 정부 규제가 강한 네 번째 나라다. 터키, 이스라엘, 멕시코, 그리스, 폴란드와 함께 ‘가장 억제적’인 국가군으로 분류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금융시장은 기업이 주식과 채권으로 투자자금을 확보하는 직접 금융시장으로 이행했다. 착시는 아마도 이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 실태를 살피면 직접 금융시장의 참여자는 죄다 대기업이며, 중소기업은 철저하게 소외돼 있다. 중소기업 금융은 여전히 연고와 속임수가 지배하는 후진적인 정책금융과 간접금융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선진형으로 진화한다고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노동시장이 크게 분절(分節)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같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동일 노동이라도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월급이 두 배 차이날 정도로 분절돼 있다. 대기업, 공기업, 대규모 서비스산업에 취업한 대졸 고학력자는 강력한 정치성향의 노동조합에 의해 보호되는데, 그들은 전체 종업원의 10%에 불과하다. 대조적으로 중소기업과 영세상공업에 종사하는 취업자의 3분의 2 이상은 비정규직으로서 근속연수가 2년에 못 미치는 비조직 상태다. 한국 노동시장에는 새로운 형태의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 차등이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 기업 내부에서 사용자와 종업원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비협조적이다.

냉정하게 관찰할 때 한국 경제는 시장경제의 네 가지 유형 가운데 가장 저급한 대중주의로 타락하는 중이다. 한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특질은 고도성장기에 걸쳐서는 한국적 국가혁신체제를 꾸리고 운용하는 원동력으로 역할을 했다. 그것이 1988년 ‘민주화시대’가 열린 이래 점차 대중주의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작금에 이르러선 집권세력이 정부 재정을 동원해 자신의 지지세력에 보상을 행하는 최악의 양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지중해 국가는 그래도 자연과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산업이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