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북핵 폐기, 행동으로 입증해야

입력 2019-06-21 17:50
강대국 파워게임에 한국은 소외
'대화 통한 평화' 허구성 경계를

전성훈 < 前 통일연구원장 >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전이 치열하다. 지난 20일 1박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안전과 발전에 도움을 제공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여건을 창조하겠다”고 말했다. 연초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 만나 한반도 정세와 비핵화 협상을 공동으로 연구·조정하는 문제를 협의한 데서 진일보했다. 동북아에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북·중·러 삼각편대가 전열을 정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지금 세계는 강대국 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거부하며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를 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을 빼기 위한 대리전의 ‘전장’으로 삼아 적극 개입하고 있다. 시 주석의 방북 목적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북·중 공조를 강화하는 데 있다.

동북아의 지정학적 파워게임이 활발히 벌어지는 와중에 한국만 소외된 느낌이다. 핵 카드를 흔들며 외교 무대를 활보하는 북한과도 비교되는 무기력한 전략 부재의 나라,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나약한 나라로 비치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은 앞으로 한 세대 이상 지속될 국제질서의 지각변동인 만큼 정부와 국민 모두 그 심각성을 깨닫고 합심해서 나라의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외, 대북 정책은 장밋빛 희망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인식에 기초해야 한다. 주변 강국들이 패권다툼을 벌이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북한이 우리를 기만하며 핵 보유를 고수하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제시한 세 가지 신뢰는 실천 가능성 차원에서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첫째, 문 대통령은 남북한 사람들의 신뢰를 강조하며, 군사분계선에서의 긴장완화와 같은 작지만 구체적이고 평범한 평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의 바람대로 이런 노력이 항구적 평화로 이어지길 원치 않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핵은 작고 평범한 평화를 일거에 집어삼킬 수 있는 거대한 쓰나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남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대화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 사회를 대화만능주의에 빠져들게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 외교도 힘으로 뒷받침해야 성공한다는 것은 국제무대의 상식이다. 삼척항으로 입항한 북한 목선에 대한 경계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만 거짓평화에 놀아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셋째, 북한이 핵폐기 의지를 보여야만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국제제재도 풀릴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은 맞다. 그러나 신뢰 회복의 전제조건은 행동으로 의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미·중, 미·러의 패권경쟁은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통일을 방해하는 구조적인 걸림돌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핵을 갖고 미국의 힘을 빼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두 나라가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와 제재 완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북핵 문제가 장기적인 문제임을 인식하고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오판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