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수용땐 외교적 협의 검토"
日 외무성 "韓 제안, 해결책 안돼"
[ 임락근/김동욱 기자 ]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한·일 양국 기업들이 자발적 출연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했다. 일본은 제안을 바로 거부했다. 한·일관계의 냉각기도 이어질 전망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19일 “확정 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함으로써 당자사들 간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며 이 같은 제안을 공개했다. 일본 측이 수용할 경우 일본 정부가 요청한 한·일 청구권협정 제3조 1항 협의 절차의 수용을 검토할 용의가 있다는 뜻도 밝혔다. 지난해 10월 옛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처음으로 일본 정부에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외교부가 공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한국 기업은 포스코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로 혜택을 본 대표적인 기업으로 전체 청구권 자금의 24%에 해당하는 1억1948만달러가 투입됐다. 우리 정부는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5억달러의 경제협력자금을 받았고 이 중 일부가 기업 지원 자금으로 쓰였다. 일본에서는 옛 신닛테쓰스미킨(현 닛폰세이테쓰·日本製鐵)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이 재원 조성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그러나 외교부 발표 즉시 제안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스가 다케시 일본 외무성 보도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정부의 제안은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는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며 “중재에 응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또 이미 “한국 측에도 이런 (거부)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의 입장을 언제 전달했느냐’는 질문에 “시기를 포함해 외교상의 대화에 대해선 자세히 밝힐 수 없다”면서도 “사전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가 일본 측이 이미 거부한 제안을 뒤늦게 ‘공식 발표’한 셈이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공식 공문이 안 와서 밝힐 입장이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이 지난 주말 일본을 비공개 방문해 이 제안을 전달했으며, 일본 측의 거부 방침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전문가들은 “상대방이 즉각 거부할 제안을 발표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며 “일본의 중재위 구성 요구 시한이 임박하자 어떻게든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발표가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배경에는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청구권협정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중재위 구성에 응하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가 협정상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유감”이라며 “한국 정부는 향후 30일 이내에 중재위원을 지명하는 제3국을 선정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도 이날 김경한 주일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불러 “제3국에 의뢰해 중재위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역제안이 불발되면서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의 한·일 정상회담은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간 일본 외무성 안팎에서는 일본 정부가 제안한 중재안 수용이 정상회담의 선행 조건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이날 산케이신문은 “한국 측에서 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 결실을 볼 수 있는 회담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는 전날 아태정책연구원 주최 외교통상정책포럼에서 “한·일 관계 악화는 덮어두고 해결을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지금의 한·일 관계는 앞으로의 미래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임락근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