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누볐던 '수출 영웅'들…고국의 품에 잠든다

입력 2019-06-18 13:18
수정 2019-06-18 13:22

1975년 갓 군(軍) 의무를 마친 스물여덟 살 청년 하영대 씨는 원양어선 ‘광명 6호’에 올랐다. 가난한 시골집 장남인 그의 어깨에 동생 세 명과 갓 결혼한 아내의 생계가 달려 있었다. 배를 타는 동안 그는 월급을 고국으로 부치고 최저 생계비로 버텼다. 몸이 아파도 참고 견뎠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형이 보내준 돈으로 따뜻하게 입고 잘 수 있으면 족했다.

하지만 제 손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그마한 행복조차 오래 가지 못했다. 1977년 불과 서른 살이던 그는 젊은 아내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조업 중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됐다. 유골은 이역만리 미국령 사모아 땅에 묻혀 40년 넘도록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 씨처럼 1970~80년대 수출 역군으로서 세계 바다를 누비다 순직해 외국에 묻힌 원양어선원 유골 3위(位)가 19일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해양수산부는 18일 스페인 라스팔마스(2위)와 미국령 사모아(1위)에 묻혀 있던 원양어선원 유골 3위를 국내로 이장한다고 발표했다.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는 70~80년대 한국 원양어선들이 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황금어장이다.

1957년 시작된 한국 원양어업은 1970년대 절정기를 맞았다. 1977년에는 원양어선 850척에 탄 2만2000여 명의 선원이 오대양을 누볐다. 원양 수산물 수출액 비중은 총수출의 5%에 달했다. 지금의 자동차부품이나 휴대전화 등 주력 수출품목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렇게 1965~1975년 원양어업 관련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만 6억6347만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1억153만달러)보다 6배 많다. 이 돈은 우리 경제 고도성장의 귀중한 초석이 됐다.

이 피같은 돈은 목숨을 담보로 벌어온 것이었다. 파도에 휩쓸려 수장된 선원이 부지기수였다. 새벽 조업 중 다른 배에 부딪혀 3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는 등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어선원들도 많았다. 목숨을 잃은 선원들은 하 씨처럼 대부분 현지에 묻혔다.

해수부와 한국원양산업협회는 가족의 유골이라도 고향에 안장하고 싶다는 유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2014년부터 원양어선원 유골을 국내로 옮겨와 가족에게 전달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사업 시작 후 올해 3위를 포함해 총 31위의 유골이 한국으로 이장됐다. 이번에 돌아온 유골 3위는 오는 26일 오전 11시 서울역에서 열리는 추모행사를 거쳐 가족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하씨의 동생 영훈씨는 “외국에서 외롭게 묻혀있는 형의 유골을 고향에 안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정부와 원양산업협회에 깊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해외 선원묘지 정비 사업도 2002년부터 시행 중이다. 현지 정부와 한인회 도움을 받아 스페인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 사모아 등 7개국의 묘지 318곳을 보수하고 관리하는 사업이다. 미국령 사모아 위령탑의 동판에는 박목월 시인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바다로 뻗으려는 겨레의 꿈을 안고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하여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땅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