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원자로 핵심기술 해외 유출…脫원전 선언 2년 만에 '예고된 참사'

입력 2019-06-17 22:15
수정 2019-06-18 09:40
국정원, 수사 착수

"脫원전에 산업 생태계 붕괴
정부가 기술 유출 방치한 셈"


[ 조재길/김형호 기자 ]
한국형 원자로의 핵심 기술이 줄줄이 해외로 유출돼 국가정보원 등 관계당국이 수사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2017년 6월 탈(脫)원전 선언 2년 만에 빚어진 ‘예고된 참사’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17일 “국정원이 한국형 원자로 기술이 해외로 빼돌려졌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관계 부처와 함께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 등은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전력기술 한전KPS 등 원전 공기업 출신의 해외 기업 이직자들이 원전 설계작업 중 취득한 자료를 폐기하지 않고 새로 취업한 외국 기업에 불법 유출한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등이 적시한 원전 기술은 한수원 등이 개발한 경수로(APR-1400) 설계와 관련한 핵심 기술이다. 유출 자료 중에는 원전의 정상 가동 여부를 진단하는 냅스(NAPS) 소프트웨어 등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해외로 이직한 한수원 전직 간부 등이 상당량의 자료를 아랍에미리트(UAE) 미국 등에 넘긴 것으로 보고 있다. 감사원 역시 국내 원전기술 보호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관계기관을 추적 감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용훈 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는 “원전 분야는 사람이 곧 기술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문인력이 외국으로 이직하는 순간 기술 유출은 피하기 어렵다”며 “UAE 등 기술 취약국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등 우리 경쟁국이 한국 원전의 취약점까지 낱낱이 알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해외 이직자 통해 UAE·美로 原電기술 넘어가"

해외로 유출된 것으로 의심받는 경수로(APR-1400) 설계기술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는 국산 원자로 관련 기술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지역에 짓고 있는 4기의 원전 역시 모두 이 모델이다. 냅스는 한국전력기술이 20여년간 공들여 개발한 원전 진단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해외 여러 설계업체가 제공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해왔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전기술은 지금까지 UAE 원자력공사에만 냅스를 유일하게 수출했다.

우리 원전기술의 해외 유출은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충분히 우려됐던 사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전산업 생태계가 급속히 붕괴되고 전문인력들이 해외로 내몰리면서 이런 상황이 빚어졌다는 얘기다.

강창호 원자력정책연대 법리분과위원장은 “2017년 탈원전 정책을 공식화한 후엔 국내에서 신규 원전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문인력이 선택할 수 있는 곳은 해외밖에 없다”며 “정부가 사실상 핵심 기술의 유출을 방치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원전 관계자는 “40여 년간 피땀 흘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확보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특히 지난달 원자력안전위원회에 APR-1400 설계도를 비롯한 한국형 경수로 핵심 기술이 미국 등으로 대거 넘어갔다는 제보가 들어와 원안위가 발칵 뒤집힌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원전 관련 설계업체에 근무하던 A씨가 UAE 원전 운영업체인 나와(NAWAH)로 이직하면서 국내 설계자료를 통째로 넘겼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수력원자력을 퇴직한 뒤 또 다른 회사에서 UAE 측 용역을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전업계에선 APR-1400의 설계 자료가 UAE 측에 모두 넘어갔다면 한국형 경수로 기술이 대부분 유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수원 측은 “우리 기술의 외부 유출을 차단하는 제도를 운영해왔다”며 “그런데도 자료 무단 유출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면 적극 협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조재길/김형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