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질문이 무서운 정부

입력 2019-06-13 17:51
백광엽 논설위원


[ 백광엽 기자 ] 미국 중앙은행(Fed)의 비밀주의는 유별났다. 1994년 이전까지는 금리결정 후에도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그러다 벤 버냉키 의장이 Fed 설립 이래 97년 만에 처음으로 2011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버냉키는 “초유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시장소통 없이는 어떤 정책도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판단이었다”고 회고했다. 사무실을 걸어잠근 뒤 예상질문을 뽑고 회견을 준비한 버냉키의 소통노력은 위기 극복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다.

한국의 관료 중에서도 소통달인이 적지 않다. 이헌재·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대표적이다. 역대 최고 관료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언제나 1, 2위를 다투는 둘의 공통점은 기자실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다는 점이다. 젊은 기자들이 쏟아내는 가시 돋친 질문도 개의치 않았다. “부총리가 중심을 못 잡아 경제상황이 어렵다는 비판이 있다”는 공격적인 질문에 이 전 부총리는 잠시 고개를 떨궈 아래를 본 뒤 “제 중심에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받아넘기기도 했다. 수위를 넘나든 절묘한 이 답변이 경제팀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민주정치의 요체는 소통이며, 소통은 묻고 답하기다. 서양철학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캐묻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했다. 양방향 대화가 진리의 발견과 고양에 필수적이라는 이 명제가 2500년 뒤 한국에서 부정되는 일이 자주 목격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말 기내 간담회에서 국내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거절했다.

한 달여 전 취임 2주년 출입기자단 간담회도 당일 취소돼 질문 기회가 원천봉쇄됐다. 급기야 박상기 법무장관은 ‘기자 없는 기자회견’이라는 촌극을 벌였다. 질문 안 받겠다는 박 장관의 쇠고집에 기자들이 회견을 보이콧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소통하는 대통령’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읊었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대토론회도 열겠다고 했다. 전임자의 ‘불통’을 그토록 비판하더니 더한 불통에 빠진 모습이다.

대화는 민주정체의 기본이자 오랜 미덕이다. 아테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에서 웅변술과 수사학이 유행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말이 없으면 존재도 영혼도 무의미해진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 그대로다. 그런데도 점점 소통은 멀어지고 ‘쇼통’만 보인다. 청와대 참모들은 페이스북에서 독설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국민이 궁금해하는 일은 대외비라며 입을 다무는 모습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비밀이 많을수록 권력은 고립된다”고 했다. 질문을 무서워하는 권력은 위기로 치닫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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