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1945년 이전 일본'과의 싸움, 벗어날 때 됐다

입력 2019-06-09 17:54
"평화와 번영의 시기
애써 외면하는 '나쁜 기억'
자유민주·시장경제 동맹에
적지 않은 걸림돌

韓·美·日 안보 협력으로
세력균형 유지해야"

현승윤 이사대우·독자서비스국장


[ 현승윤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말 일본을 방문했다. 진주만 공습을 주도했던 항공모함 이름과 같은 호위함 ‘가가호’에 오른 그는 “일본은 미군의 믿을 수 있는 파트너”라며 “여러 지역의 분쟁 해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한 이후 군사력을 강화해왔다. 가가호와 이즈모호를 항공모함으로 개조해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미국의 최첨단 전투기 F-35B 42대를 탑재할 예정이다. 이와는 별개로 F-35A 전투기 105대를 들여와 공군력도 증강한다. 미국을 제외하면 F-35 전투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는 국가가 된다.

이런 일본의 급부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기억 속에는 두 개의 일본이 있다. ‘1945년 이전’과 ‘그 이후’다. 1945년 이전의 일본은 주권을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사람들의 성(姓)과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1945년 이후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다.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히 발전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많은 기업이 일본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도 좋은 추억이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1945년 이전의 나쁜 기억’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문재인 정부 들어 위안부 합의 사실상 파기,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이 나왔다. 뼈아픈 과거사들이 외교 현안으로 되살아났다. 우리는 지금 ‘1945년 이전의 일본’과 싸우는 중이다.

일본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 사회다. 1990년대 이후 장기 침체로 사회 전반의 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지금의 국제질서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아베 총리가 들어선 뒤 자위대를 강화하고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조차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여론이 여전히 많다. 군국주의로 빠져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을 ‘우리 미래의 적(敵)’으로 여긴다. 반면 사회주의 독재국가인 중국에 대해선 친근감을 느낀다. 한국과 일본을 모두 동맹국으로 두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 추모일을 2014년 처음으로 국가급 추도일로 지정하는 등 반일 감정을 자극해 왔다. 그해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호응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말 중국 방문을 앞두고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3불(不)정책의 하나로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를 압박한 중국 외교의 승리다.

미국과 중국 간 경제전쟁이 무력충돌로 번지게 되면 그 지역은 아시아가 될 공산이 크다. 중국의 급팽창을 누르고 있는 곳이 일본-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제1열도선’이다. 이 지역에는 미군기지들이 많다. 한국도 당연히 포함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사상 최악 수준이다.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를 단독으로 만날지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를 정도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함께 누려온 나라다. 지난 70여 년의 세월은 그 가치를 충분히 입증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우려해 한·미·일 공동의 안보체제 강화를 회피하는 것은 ‘과거의 나쁜 기억’과의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공백을 일본이 혼자 메우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외면할수록 일본의 군사적 역할은 커진다.

한국은 5000만 명이 넘는 인구에 국내총생산 기준 세계 11위(2017년) 국가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충분히 큰 나라’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강대국들의 충돌을 막는 ‘세력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일제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신감부터 되찾아야 한다. 윈스턴 처칠(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의 경구(警句)처럼 과거와 현재가 싸워 미래가 망가지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