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지연' 비판에만 올인
[ 김우섭/양길성 기자 ] 집권 여당이 ‘추가경정예산 블랙홀’에 빠져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사회 갈등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건설노조 총파업과 조선업 구조조정, 택시와 승차공유업체의 대립 등으로 대혼란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지만 이를 조정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권 내에서조차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몸을 사린다는 내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추경·한국당 비판에만 ‘올인’
9일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회의나 논평은 △추경안 등 국회 파행 지적 △자유한국당 비판 △헝가리 유람선 사태 추모 △돼지열병 예방 등에 국한돼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비슷한 내용의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다. 국회 파행으로 인한 추경안 처리 지연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지난달부터 9일까지 거의 매일 반복되고 있다.
반면 최근 들어 전방위로 불거지는 각종 사회 갈등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 개포동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서로 자신의 조합원을 채용해달라며 파업에 들어간 문제가 대표적이다. 대한건설단체총연합회 등 관련 12개 단체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국토교통위원회, 여야 3당 교섭단체 정책위원회 의장 등에게 갈등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정치권이 계류돼 있는 관련 법안을 논의하면 좋겠지만, 최소한 법과 원칙만 지켜달라고 얘기만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라며 “하지만 노조와 관련돼 있으면 여당이 움직이길 꺼린다”고 말했다.
여당을 대신해 고용노동부와 노조 간 갈등 중재에 나섰던 임이자 한국당 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전국 건설현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노조 간 갈등에 여당이 눈치를 보느라 눈과 입을 닫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최근 노조 간 밥그릇 싸움에 “민주노총을 거의 공공의 적처럼 지목하는데 우리는 균형감 있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사실상 침묵을 통해 민주노총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국의 대형 타워크레인 83%가 멈춰 건설사들이 수백억원의 손실을 본 파업 사태에 대해서도 여권은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M&A) 과정에서 벌어진 노조의 불법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민주당 지도부는 “각 주체끼리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며 책임을 피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데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M&A를 주도한 점을 감안하면 여당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총선 앞두고 “전선 넓히지 말자”
승차공유 서비스인 ‘타다’를 둘러싼 논란에도 민주당은 “전선(戰線)을 넓히지 말자”는 전략으로 일관하고 있다. 카풀(출퇴근 승차공유) 도입을 위한 노·사·정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끝난 지 석 달도 안된 상황에서 ‘타다’ 문제까지 해결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기사 월급제 도입 법안 등 이번 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법안이 많다”며 “이를 해결하지 않고 섣불리 뛰어들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더욱이 택시 기사 월급제 도입 등은 국회 파행으로 석 달째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타다를 비판하고, 국회는 무관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사업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여권이 사회적 갈등 중재에 소극적인 이유는 1년도 안 남은 총선을 의식해서다. 한 민주당 의원은 “노동계와 등을 져 지지율 추락을 겪은 노무현 정부의 모습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게 당내 의원들의 공통적 의견”이라며 “갈등 중재 역할은 정부에 맡기고 여권은 경제와 비(非)갈등 현안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택시 카풀 갈등을 중재하다가 여러 단체로부터 비판받은 경험도 일부 작용하고 있다. 카풀 도입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기구는 격론 끝에 지난 3월 노·사·정 합의를 이뤄냈지만 논의 과정에서의 택시기사 분신 등 여러 갈등과 불만이 나왔다. 준비 없이 섣불리 조정 작업에 나설 경우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여권 일부 중진들 사이에선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각각의 이슈 모두 각 계층의 생존권이 걸린 민생 현안인 만큼 무대응으로 일관해선 안 된다는 질책이다.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노조에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는 경고성 메시지라도 누군가는 내야 했다”며 “사회적 갈등에 여당이 책임을 방기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우섭/양길성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