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5) 법도(法道)와 경건(敬虔)
인간만이 후회한다. 인간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숙고하고, 실수가 있었다면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동물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후회하거나,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 동물들은 매 순간 몰입해 순간을 영원처럼 산다. 후회가 때로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과 장소인 ‘지금-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나은 삶,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후회는 매일 하는 마당청소와 방청소처럼 꼭 필요한 삶의 의례다. 새벽 미명에 그날 해야만 하는 한 가지 임무를 떠올리는 수고만큼이나 늦은 저녁 잠들기 전 결심한 일의 성과를 복기하는 것도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의무다.
후회
인간은 누구나 만족스러운 삶을 원한다. 그런 삶을 추구하고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가 ‘행복’이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물질적인 공간이 ‘도시’다. 그리고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한 소통 도구가 ‘문자’다. 30만 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한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즉 기원전 3000년경이 돼서야 도시를 구축하고 문자를 발명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동물’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새롭게 정의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잠시 숨 쉬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 ‘아담(adam)’이란 단어로, 그들의 정의를 받아들인 로마인들은 인간을 ‘흙’이란 뜻의 ‘호모(homo)’로 불렀다. 두 정의는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우울한 명칭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났지만 동물의 속성을 벗어날 수 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만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야만적인 인간이 신적인 인간을 추구하며 만들어낸 구체적인 장치가 도시다.
조온 폴리티콘이란 문구는 ‘도시 안에 거주하는 동물’이란 의미다. 도시는 나와는 전혀 다른 생활방식, 이념, 종교, 세계관을 지닌 다양한 인간과 공존하고 어울리는 삶을 모색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다름’의 집합체다. 그 다름은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는 대상이다. 도시는 그 다름을 나무라지 않고 인정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수련장이다. 시민들은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고, 타인의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그런 생각을 귀가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이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했다.
통치자의 법
도시라는 인위적이고 불안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가 ‘법도(法道)’다. 각각의 시민이 선호하는 가치와 그 가치를 보장하는 제도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인류는 도시문명을 탄생시키는 동시에 ‘법(法)’이란 개념을 만들어 성문화했다. 시민들 각자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절충안이다. 그 법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시민들의 과반수 동의를 얻은 차선(次善)이다. 법이란 오랜 세월에 거쳐 대다수에게 선(善)으로 수용된 도시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법을 어기는 행위는 도시의 안정을 파괴하고 문명사회를 야만사회로 되돌리는 어리석고 파렴치한 위반이다. 시민은 그 법을 준수하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누가, 어떤 권위로 도시의 기초가 되는 법을 정할 수 있는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은 한 사람의 독재자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해 의견을 표시하는 ‘투표’ 제도를 도입하고 도시의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참여민주주의(參與民主主義)를 실험하고 있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에 등장한 크뤼소테미스와 엘렉트라는 자매임에도 불구, 상이한 법도를 주장한다. 크뤼소테미스에게 법도는 통치자의 말이다. 그러나 엘렉트라에게 법도는 통치자의 말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것이다.
영리한 처세
크뤼소테미스는 자신에게 부, 명성, 그리고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 법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름은 ‘황금(크뤼소)이 법(테미스)이다’란 뜻이다. 엘렉트라는 크뤼소테미스를 꾸짖는다.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한데, 너는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나에게 행동하지 말라고 종용하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비참할 뿐만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한 거야.”(348~352행)
엘렉트라는 비록 핍박을 받더라도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양심이라는 원칙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이름에서도 등장한다. ‘엘렉트라’는 보석의 일종인 ‘호박’이란 의미지만, 동시에 ‘침대(렉트라)가 없는(아) 여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침대가 없는 여인’이란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갈 여인이다. 그러나 그런 삶도 마다하지 않는 삶의 원칙이 있다. 그의 양심이다.
크뤼소테미스에게는 실리를 챙기는 것이 곧 삶의 철학이며 법이다. 양심은 인간에게 어떤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는 양심에 집착하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영리한 삶은 통치자에게 절대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해 살해한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의 꼭두각시다. 그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 무덤에 제주를 부으며 애도할 참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르고스 시민들의 눈을 의식해 선왕에 대한 형식적인 의례를 딸에게 주문했다. 엘렉트라에게 어머니와 동생의 행위는 가식이며 가증이다. 인간의 양심보다 더 위대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법도와 경건
엘렉트라는 크뤼소테미스에게 말한다.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무덤에 닿지 않게 해. 가증스러운 아내에게서 아버지께 제물과 제주를 갖다 드린다는 것은 법도(法道)에 어긋나고 경건(敬虔)하지도 않아.” (431~434행) 엘렉트라는 ‘법도’와 ‘경건’이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테미스(themis)’와 ‘호시온(hosion)’이란 그리스 단어를 사용했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