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호 < 성균관대 의대 학장·소아청소년과 i101016@skku.edu >
병도 진화한다. 우리나라에 없다고 알려졌던 크론병이 본격 나타난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환경이 개선되고 식생활이 바뀌더니 선진국 병이라는 크론병이 어김없이 우리 옆에 다가왔다. 이제는 희귀병이 아닌 수준으로 유병률(전체 인구 중 특정 장애나 질병 등을 가진 사람 비율)이 높아졌다. 주로 15세가 넘던 발병 연령이 10세 이하에서도 볼 수 있는 병으로 변화했다. 설사와 복통, 체중 감소와 항문병변이 오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요즘은 교과서에서 보기 어려운 증상으로도 자주 나타난다. 인간과 함께 공진화(coevolution)하는 게 아닌가 두렵기까지 하다.
치료도 진화했다. 이제는 스테로이드나 항염증제 혹은 면역억제제를 쓰는 데서 벗어나 생물학적 항체가 초기 치료로 도입되고 있다. 약물의 체내 농도를 미리 측정하고 약물작용을 방해하는 항체를 모니터링해 개인별 맞춤치료를 할 수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정밀의학의 시대다. 그런데 이 혜택이 환자에게 빠르게 다가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께 북대서양은 대구 천지였다. 배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많던 대구는 이후 100년간 급격히 감소했다. 대니얼 폴리는 미국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각 세대의 어류학자는 자신이 연구할 때의 어족 자원을 기준선으로 삼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어류학자는 줄어든 어족 규모를 새로운 기준선으로 설정한다”며 “기준선이 이동하면서 학자들은 어족이 사라지는 것을 수용한다”고 했다.
이런 ‘기준선 이동 증후군’은 질병 치료에 핵심 개념이 돼야 한다. 의사는 치료 패러다임의 변화를 받아들여 최선의 진료를 해야 한다. 그러나 도제 교육이 몸에 밴 의료 시스템에서 스승이 변하지 않으면 제자는 더 변하기 어렵다. 기준선이 바뀌었음에도 치료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대로 유지되기 쉽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 언급됐다. 한 시대의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현재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과학연구가 이뤄지다가 변이가 발견되고, 이것이 위기에 다다르면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 새로운 정상과학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현상유지 편향’에 취약하다. 이런 점에서 기준선 이동 증후군을 의사의 통찰로 잘 활용한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호모 데우스》의 표지를 넘기면 자필 서명으로 “Everything changes(모든 것은 변한다)”라고 적혀 있다. 세상은 늘 변하고 있지만 태양 아래 모든 것 중 인간이 가장 늦게 진화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