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회복지는 정부 몫…기업에 떠넘겨선 안 된다

입력 2019-06-04 17:44
'적자·부채 늪' 한전에 누진제 완화비용 덤터기
무차별 선심으로 글로벌 상장사에 '멍에' 씌워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전력이 매년 7, 8월에 전기요금 누진제를 완화 또는 폐지해 가계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발표했다. ‘민·관 전기요금 누진제 TF(태스크포스)’가 그제 내놓은 방안은 ▷1안: 작년처럼 누진구간 확대 ▷2안: 누진제 3단계서 2단계로 축소 ▷3안: 누진제 폐지(단일요금제 전환) 등 세 가지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이 이미 “전기료 인상은 없다”고 못박아, 일부 요금 인상이 필요한 3안은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정부·여당은 할인대상(1629만 가구)이 가장 많은 1안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냉방 수요가 급증하는 여름철 전기료를 깎아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안이든 연간 1911억~2985억원의 요금 할인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 따져보면 찜찜한 마음을 떨치기 어렵다. 정부가 재정으로 메워준다지만, 작년에도 할인비용 3611억원 중 357억원만 지급했을 뿐 대부분 한전이 떠안았다. 탈(脫)원전과 연료가격 상승 여파로 적자 늪에 빠진 한전에 또 손실을 안길 판이다.

한전의 경영상태는 말이 아니다. 지난해 1조1745억원 적자(연결기준)에 이어 올 1분기에 7611억원의 손실을 봤다. 부채는 1년 전보다 7조원 이상 늘어난 약 120조원(3월 말)에 이르고 부채비율도 173%나 된다. 일각에선 ‘공기업’인 한전이 연 3000억원 정도 부담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공기업도 기업이고, 존속가능해야 공익성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전은 뉴욕증시에 ‘Kepco’로 상장돼 해외 주주들도 많다. 정부가 원칙 없이 전기료를 좌지우지하며 한전 경영에 ‘멍에’를 씌우는 행태가 어떻게 비치겠나. 국가신인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3년 전 6만원대이던 한전 주가는 2만원대로 추락해 소액주주들이 집단소송까지 준비 중이다. 외국인 주주들(지분율 27.0%)이 잠자코 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해마다 불거진 누진제 논란을 정부가 근본적으로 해소할 의지가 있다면 3안대로 폐지하는 게 정답이다. 그러려면 전력 저소비층(1416만 가구)에 대해 소폭 요금인상을 설득해야 할 텐데, 정부는 ‘쉬운 길’ ‘인기 끄는 길’로만 가려고 한다. 또한 1인 가구, 맞벌이 가구가 크게 늘어나 전력 저소비층이 저소득층과 일치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전기료는 각자의 부담능력과 사용량에 맞춰 요금을 매기되, 저소득층에 대해선 ‘에너지 바우처’를 통해 지원하는 게 정상이다. 그게 시장원리에도 부합한다.

사회복지와 공공서비스는 정부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역대 정권마다 전기료뿐 아니라 ‘기름값이 묘하다’는 식으로 유가, 통신비 등 시장가격에 수시로 개입하고 부담을 공기업은 물론 사기업에까지 전가해왔다. 기업들을 경쟁시켜 가격을 낮출 생각은 않고, 정치적 선심쓰기와 기업 팔 비틀기로 일관하면서 시장경제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못된 버릇’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보편적 복지는 보편적 증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해 펴는 게 선진 복지국가들의 공통점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차별적으로 복지와 공공서비스 혜택을 늘리면서 ‘증세는 없다’ ‘요금인상은 없다’는 식으로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는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