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보험산업 (2) 줄줄 새는 보험금
일부 병·의원 모럴 해저드 심각
"실손의료보험 있으면 괜찮다"
환자들에게 고액 도수치료 제안
진단서만 있으면 보험금 청구 쉬워
[ 강경민 기자 ]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A정형외과. 근처 직장인이 자주 찾는 이 병원의 대기실은 20대 여성부터 50대 중년 남성까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상담 신청을 해봤다. 몸에 특별한 이상 증상이 없는데도 전문 상담원은 척추측만과 거북목 증상이 심각하다며 20회가량의 도수치료를 권했다. 그러면서 “회당 도수치료비는 20만원이지만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했으면 자기부담금은 회당 2만원에 불과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손의료보험을 활용한 과잉 도수치료 관행이 일부 병·의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과잉 도수치료로 보험금이 과다 지급되면 모든 실손의료보험 가입자의 보험료가 올라가게 된다. 의사와 환자 간 불신의 골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액 도수치료 권하는 병원
도수치료는 약물 치료나 수술 없이 맨손으로 근육과 뼈를 만져 통증을 완화하는 치료 방법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도수치료 비용은 최저 3000원에서 최고 50만원에 달한다. 도수치료는 건강보험 급여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항목이다. 환자들이 진료비를 전액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환자는 비용 부담을 피하기 위해 실손보험을 활용한다. 2009년 10월 이전에 판매된 옛 실손상품의 자기부담금은 0원이다. 2009년 10월부터 판매된 표준화 실손상품의 자기부담금도 전체 진료비의 10~20%에 불과하다. 회당 도수치료비가 10만원이라면 환자는 최대 2만원만 부담하면 된다는 얘기다.
실손보험 표준약관에 따르면 도수치료는 연간 180회까지 받을 수 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도수치료에 대한 명확한 심사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의사 진단서만 있으면 손쉽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일부 병·의원이 환자에게 고액의 도수치료를 권하는 것도 이런 맹점을 악용한 것이다.
실손보험을 활용해 고액의 과잉 도수치료를 받는 수법은 수년 전부터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실손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보험설계사를 통해 입소문이 퍼졌다. 특별한 통증이 없는데도 도수치료를 마사지(경락)처럼 여기고 틈날 때마다 받는 일부 환자의 ‘도덕적 해이’ 현상도 만연하다는 것이 보험업계의 설명이다.
실손보험을 활용한 도수치료 수요가 늘면서 물리치료사 수급이 어려워지자 일부 병원이 사설학원 과정을 이수한 체육대 졸업생 등 비(非)의료인을 채용하는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물리치료사들이 의사 명의를 빌려 사무장 병원 형태의 도수치료 전문병원을 개설하는 사례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선량한 대다수 가입자들 피해
과잉 도수치료로 인해 실손보험에서 비급여 지급이 늘어나면 보험사 손해율(보험료 대비 지급한 보험금 비율)이 상승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실손보험 손해율은 122.9%에 달한다. 적자가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보험사들은 연간 도수치료 보험금 지급 규모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가입자에게 지급된 실손보험금은 7조5000억원에 이른다. 이 중 상당액이 도수치료 보험금으로 지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험사 관계자는 “보험금 지급 수치가 공개되면 상품 설계가 잘못됐음에도 무작정 판매했다는 것이 드러난다”며 “보험사들로서도 실손보험은 딜레마”라고 지적했다. 보험사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관행적으로 실손보험을 미끼 삼아 다른 보험상품을 대거 끼워 팔았다.
보험사들은 손해율이 상승하면 보험료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과잉 도수치료를 받는 일부 가입자 때문에 대다수 선량한 가입자들이 비싼 보험료를 감당해야 한다는 얘기다. ‘과잉 진료→보험금 과다 지급→손해율 상승→보험료 인상’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지난 4월부터 한방 추나요법이 건강보험 적용을 받으면서 자동차보험금이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추나요법은 한의사가 손 또는 신체 일부분을 이용해 관절, 근육, 인대 등을 조정 혹은 교정하는 한방 치료법을 뜻한다. 양방의 도수치료와 거의 차이가 없다. 추나치료는 자동차보험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추나요법에 적용되는 자동차보험 수가는 1만8000원 정도였지만 급여화가 이뤄지면서 단계별로 2~3배가량 높아졌다. 수가 인상으로 환자들의 진료비 청구가 급증하면서 자동차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보험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