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기일수록
미래투자 중단 말라"
[ 좌동욱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 지난 1일 반도체·부품(DS) 부문 사장단에게 “중장기 투자·고용 계획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달라”고 지시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 등으로 임직원이 동요하는 조짐을 보이자 이 부회장이 직접 위기의식을 주문하며 기강 확립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1일 경기 화성사업장에서 이 부회장 주재로 DS 부문 사장단 회의를 열었다고 2일 밝혔다. 그가 주말에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것은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대신해 그룹 경영을 맡은 이후 처음이다.
이 부회장은 회의에서 “지난 50년간 지속적인 혁신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어려운 시기에도 중단하지 않았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며 “18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고용 계획과 133조원 규모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 계획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반도체 불황 등으로 이익이 잠시 줄어든다고 해서 미래를 위한 투자까지 미뤄선 안 된다는 의미다. 그는 “단기적인 기회와 성과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고도 강조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수백조원의 투자를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며 “경영진도 공감하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사실상 '비상경영' 선포한 이재용…"투자·고용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
“삼성전자라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삼성 안팎의 거센 외풍에 휘둘리며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삼성의 전직 고위임원은 2일 삼성전자 경영진이 느끼고 있는 내부의 무거운 분위기를 이같이 전했다.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에 반도체와 스마트폰 업황 둔화라는 외풍을 정면으로 맞고 있다. 여기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가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삼성전자의 핵심 경영진도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경제계 한 인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말에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흔들리지 말라’고 주문한 것은 사실상 임직원들에게 비상경영을 선언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답답한 이재용, 주말 사장단 회의 주재
글로벌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전사적 노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시기에 삼성전자의 경영진은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검찰과 경찰 수사를 3년째 받고 있다. 뇌물공여죄로 시작된 범죄 혐의는 노동조합 조직 와해, 분식회계, 증거인멸, 사기대출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최근 1년간 검찰 압수수색 등으로 회사 업무가 지장을 받은 날짜를 따져봤더니 무려 150일이 넘더라”고 전했다.
2017년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전자 계열사의 컨트롤타워인 삼성전자의 사업지원태스크포스(TF) 조직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내부에선 “한 해 200조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이는 삼성전자 거대 선단이 제각각 나뉜 채 각자도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부회장이 토요일인 지난 1일 반도체 사업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배경이다. 내부적으로 “삼성 안팎의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그동안 묵묵히 일하던 직원들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고개를 들고 있다. 사장단 회의와 같은 형식적 행사를 좋아하지 않는 이 부회장이 주말 회의 사실을 대내외에 공개한 이유다. 이 부회장이 ‘임직원들이 최근 일련의 사태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근원적 기술경쟁력 확보해야”
이 부회장은 이날 임직원들에게 “단기적인 기회와 성과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삼성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장기적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외부에 공개된 이 부회장의 발언 수위 중 가장 세다”고 말했다. 이날 사장단 간담회는 오찬을 포함해 4시간가량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내부에선 반도체 업황 둔화 등으로 영업이익이 지난해에 비해 ‘반토막’ 수준으로 급감할 조짐을 보이자 올해 투자 계획을 업황이 살아나는 내년 또는 후년으로 미뤄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내부 여론을 감지한 듯 “작년에 발표한 3년간 180조원 투자와 4만 명 채용 계획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직원들에게 기강 확립을 주문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이 부회장이 말한 ‘단기적인 기회’의 대표 사례는 화웨이라는 분석이다. 삼성 내부에서는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인 화웨이가 미국 정부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는 상황이 기회가 아니라 위기가 될지 모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 글로벌 경기가 둔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삼성의 부품 공급망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의 전직 경영진은 “최근 만나본 삼성의 현직 고위경영진이 현재 닥쳐온 위기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자기 사업부문의 이익과 성과에만 급급한 모습”이라고 한탄했다.
사실상 와해된 ‘사업지원TF’
삼성 내부에선 핵심 전략과 인사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다시 구성된 컨트롤타워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고 있는 데 따른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를 수사하는 검찰은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혐의로 사업지원TF 소속 임원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사업지원TF 소속 4명의 부사장 중 김모 부사장은 지난달 구속됐고, 안모 부사장은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황이다. 김 부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투자와 전략을 총괄하고 있고, 안 부사장은 인수합병(M&A) 실무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검찰은 사업지원TF를 이끌고 있는 정현호 사장도 소환 조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관계자는 “사업지원TF가 그동안 해오던 전략 수립과 계열사 이해관계 조정 업무는 사실상 올스톱됐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이 반도체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미래를 위한 중장기 투자를 흔들림 없이 추진해달라”고 당부한 것도 이런 업무를 담당하던 사업지원TF가 무력화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변화된 시대에 맞게 사업지원TF의 조직과 권한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며 “검찰 수사가 빨리 끝나야 삼성도 내부 정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