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사·각화사·현불사…수려한 풍광속 '숨은 고찰'

입력 2019-06-02 15:05
여행의 향기

숨겨진 봉화 이야기 - 전통사찰


봉화는 깊은 산골짜기마다 이름난 고찰을 품고 있다. 천년을 이어온 사찰들은 대개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봉화의 수려한 풍광 속에 있는 청량사, 공양을 지을 때면 쌀뜨물이 십리 개울물을 물들였을 정도로 거대했던 축서사, 국보로 지정된 불상인 북지리마애여래좌상까지 불교문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수려한 청량산이 품은 천년고찰 청량사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 연화봉 기슭에 있는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수려한 기암괴석이 펼쳐진 청량산 일주문을 지나 이정표를 따라가면 가파른 산 비탈길 가장자리에 돌계단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그 끝에 이르면 청량산 열두 암봉 한가운데에 청량사가 있다. 청량사는 예전에 연대사(蓮臺寺)로 불리며 3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 연대사는 무너지고 부속 건물 중 하나였던 유리보전이 중심 전각이 돼 청량사라는 사찰로 이름을 바꿨다.

원효대사가 연대사를 창건할 당시 절 아랫마을에 내려가다 논을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농부가 부리던 소는 뿔이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소는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부에게 소를 시주할 것을 권했고 농부는 군말 없이 소를 내주었다. 제멋대로 날뛰던 소가 절에 오니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소는 청량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재목과 물건을 밤낮없이 나르다 준공을 하루 앞두고 생을 마쳤다.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죽은 소를 유리보전 앞에 있는 소나무 자리에 묻었는데, 그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 ‘삼각우송’이라 불렀다.

청량사에는 깊은 역사처럼 오래된 보물도 있다. 청량사 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이다. 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삼베를 입혔다. 그 위에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일정한 두께가 되면 조각해 제작한 건칠불상이다. 복장유물은 불상을 만들 때 사리나 경전 같은 유물을 가슴이나 뱃속에 봉안한 것이다. 8세기 후반~10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약사여래좌상은 우리나라 건칠불상의 시원적 작품으로 조각사적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백두대간 능선 너머 석양이 아름다운 축서사

축서사는 물야면 백두대간 정기가 어린 문수산 기슭, 해발 800m에 있다. 금강송 솔향기가 깊이 퍼지는 숲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사찰이다. 사찰 도량에 서면 파도처럼 이어진 산 능선이 사찰 아래 구름처럼 깔려 있다. 구름 속에 떠오른 소백산 봉우리 너머로 지는 석양은 봉화 8경에 꼽힐 만큼 아름답다.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창건 당시 설화가 있다.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다. 스님이 어느날 밤 휘황찬란한 빛이 발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동자가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불상만 남았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의상대사는 불상을 모실 곳을 찾다가 지금의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셔 축서사를 창건했다. 문수보살이 나타났다고 해서 산 이름도 문수산으로 불린다.

축서사는 공양을 지을 때면 쌀뜨물이 십리 개울물을 물들였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선승당, 백화당, 범종각 등 여러 채의 전각과 도솔암, 천수암 같은 암자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의병들의 무장봉기 기지가 됐다. 이런 이유로 일제가 강제로 불을 질러 보광전만 남고 모두 탔다.

경내에 우뚝 서 있는 사리보탑은 전통 한옥을 모티브로 한 5층 석탑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 112과를 봉안했다. 사찰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보물각에는 조선 영조 44년에 만들어진 괘불탱화가 있다.

한때 국내 3대 사찰이던 각화사

춘양면 각화산 중턱에 있는 각화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 원래 춘양고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이름은 남화사였는데, 각화산 기슭에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불렀다. 한때 800여 명의 승려가 수행하던 국내 3대 사찰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백산 사고(史庫)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1606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 사고는 불타 사라졌고 터만 남아 있다.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지금은 소박한 사찰이지만 사찰로 들어서는 계단에 막돌로 쌓은 기단이 멋스럽다.

삼층석탑이 있는 고적한 사찰 천성사

봉성면 금봉리에 있는 천성사는 1952년 현 주지 이화성이 창건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고적한 사찰을 홀로 꾸려가고 있는 주지 스님이 먼 길을 찾아온 여행자를 맞이한다.

사찰 법당 안에 있는 석조여래입상과 사찰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원래 봉성면 봉성리 성황곡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천성사 석조여래입상은 광배가 없다. 두 손을 새로 만든 것 외에는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석불입상이다. 아담한 이목구비, 둥글둥글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통통한 다리, U자 모양의 옷 주름선이 부드럽다. 굴곡진 곡선과 균형 잡힌 모습에 신라 불상의 특징이 잘 반영돼 있다.

매력적인 국보 지림사 북지리마애여래좌상

봉화의 전통사찰은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산속에 있지만 물야면의 지림사는 평지에 세워진 사찰이다. 사찰은 단출하다. 지림사의 백미는 북지리마애여래좌상이다. 바위에 새긴 마애불은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높이가 4m나 된다. 국보로 지정됐다. 북지리마애여래좌상은 자연 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 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커다란 불좌상을 돌출되게 새겼다. 불상의 큼직한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양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옷은 굵게 주름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까지 덮고 있다. 당당한 체구에 오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은 장중하다. 불상 뒤편 광배는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했고 머리 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사명대사의 시호를 따서 지은 홍제사

소천면 고선리 홍제사로 가는 길은 차가 겨우 한 대 지날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다. 태백산 깊고 깊은 산길을 올라 만난 사찰은 기대와는 달리 기와집 같은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다. 홍제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와 신라 30대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선조 때에 사명대사가 사찰 뒷산의 도솔암에서 수도하면서 사찰을 수리하고, 그의 시호를 따서 홍제사라 불렀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던 원래 건물은 화재로 불타 사라졌고, 1966년에 새로 지은 사찰은 아담하다.

화려한 사찰 불승종의 총본산 현불사

석포면 대현리에 있는 현불사는 태백산이 장대하게 펼쳐지고 열목어가 사는 백천계곡이 흐른다. 숲길을 따라 걸으면 신라 성덕대왕 신종을 본떴다는 보현종각이 나온다. 현불사 앞에 다다르면 열목어가 사는 연못과 대득도교의 아치가 인상적이다. 현불사는 불승종의 총본산이다. 1989년 불승종의 창종주 설송종조가 깨달음을 얻고 창건했다. 수려한 풍광 속의 화려한 사찰에 우리나라 정치인이 많이 찾아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예견한 사찰로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 현불사 영령보탑 앞에서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추계대제에 참석했는데 그날 밤 보탑에서 오색방광이 일어났다고 한다.

봉화=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