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매출·재고 급증 '직격탄'…기업, 이익내도 손에 쥐는 돈이 없다

입력 2019-05-30 18:03
10대 기업마저 현금이 안 들어온다

1분기 '영업 현금흐름' 54% 급감
매출채권·재고자산은 사상 최대


[ 송종현/임근호 기자 ]
국내 10대 기업이 1분기에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이 역대 최대폭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경기 부진 여파로 매출채권(외상매출금), 재고자산 등이 급증한 탓이다. 재무제표에 잡히는 장부상 영업이익, 순이익 감소폭보다 현금 유입 감소폭이 훨씬 컸다. 현금흐름 악화는 투자 등 기업활동 위축으로 이어진다.

30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 등 10대 기업(매출 기준)의 1분기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2조3963억원으로, 전년 동기(27조369억원)보다 54.1% 줄었다. 이는 국제회계기준(IFRS)이 전면 도입된 2012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현금흐름은 영업을 통해 발생하는 현금의 유입·유출로 실제 현금 창출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어음 등 외상매출과 미수금, 재고자산 등은 현금흐름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1분기 말 기준 10대 기업의 매출채권과 재고자산은 각각 86조9126억원, 88조9633억원으로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기 불황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신호”라며 “대기업이 이 정도면 중견·중소기업은 더 악화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금흐름이 무너지면 순이익을 내고도 흑자도산하는 사례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줄었다는 것은 기업이 열심히 물건을 제조해 팔았는데 손에 쥔 현금이 감소했다는 의미”라며 “투자를 더 위축시켜 위기를 가중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작년 4분기 10대 기업의 순이익은 1년 전보다 31.2% 줄어 2016년 3분기 이후 처음 감소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기업들이 영업으로 실제 손에 쥔 현금을 뜻하는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0.3% 늘어 증가세를 유지했다. 적극적으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서 현금흐름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데 안간힘을 쓴 덕분이었다.

하지만 올해 1분기엔 역부족이었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전년 동기 대비 54.1% 급감했다. 반도체 등 주력업종 업황이 일제히 악화되면서 순이익이 급감한 가운데 매출채권(외상매출금) 재고자산 등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늘었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순이익보다 큰 폭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회계학에서는 이익의 질이 안 좋아졌다고 표현한다”며 “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신호”라고 우려했다.

IT·화학 현금흐름 크게 악화

30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0대 기업(매출액 기준) 중 1분기에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1년 전보다 늘어난 곳은 64.4% 불어난 현대모비스 한 곳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크게 줄었다.

삼성전자가 15조6164억원에서 5조2443억원으로 66.4% 쪼그라들어 감소율 1위에 올랐다. LG전자(-57.3%) LG화학(-51.0%) SK이노베이션(-44.3%) SK하이닉스(-41.8%) 등이 뒤를 이었다. 업황부진으로 인한 제품가격 하락(삼성전자·SK하이닉스), 유가 상승에 따른 원재료 비용 증가(LG화학·SK이노베이션) 등으로 순이익 규모가 급감한 게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매출채권·재고자산 급증

10대 기업의 1분기 영업활동 현금흐름 감소율은 54.1%였다. 순이익 감소폭(47.9%)이 컸다. 매출채권, 재고자산이 급격히 늘어나 현금흐름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다. 매출채권은 거래처 경영상황이 어려워져 어음이나 외상결제를 할 때 늘어난다. 1분기 말 기준 10대 기업의 매출채권과 재고자산은 각각 86조9126억원, 88조9633억원이다. 전년 동기 대비 5.1%, 13.4% 증가한 것으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일부 기업은 순이익이 증가했는데도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자동차는 순이익이 작년 1분기 7316억원에서 올해 1분기 9538억원으로 30.3% 불어났다. 그러나 같은 기간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1조3002억원에서 9350억원으로 28.0% 줄었다. 매출채권과 재고자산이 각각 4345억원(8.8%)과 1997억원(8.0%) 증가하면서 악영향을 줬다.

기아자동차는 순이익은 늘었는데 현금흐름이 아예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순이익은 4320억원에서 6491억원으로 50.2% 급증했지만,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7137억원에서 -1728억원으로 적자전환했다. 재고자산 증가(8조2004억원→8조4160억원)가 핵심요인으로 꼽힌다.

“현금흐름이 실적보다 중요”

김상완 대현회계법인 이사는 “지금과 같은 위기국면에선 기업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을 따질 때 영업이익보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을 더 비중 있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영업이익을 내더라도 현금흐름이 나빠져 파산에 이르는 기업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현금흐름이 악화되면 대기업들도 글로벌 경기둔화 시기에 등장하는 값싼 인수합병(M&A) ‘타깃’을 놓친다거나, 유형자산 취득을 못 해 반등기에 위기탈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0대 기업들이 1분기 유형자산 취득에 사용한 금액은 총 13조1469억원으로 26.6% 감소했다.

김윤경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한국 간판기업들은 앞으로 상당 기간을 책임질 새 먹거리 확보나 사업재편을 마무리짓지 못했다”며 “이런 가운데 현금흐름까지 악화되면 M&A나 설비투자를 주저하게 돼 기업들의 성장동력을 더욱 저하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만우 교수는 “경기 불황기에는 생산량을 적극적으로 줄여 재고자산을 감소시켜야 하는데 한국의 경우 노동조합의 입김이 세 생산을 줄이지 못하니 불황에도 재고는 계속 쌓여 기업 부담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송종현/임근호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