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영의 논점과 관점] 정부 주도 산업정책의 함정

입력 2019-05-28 17:36
양준영 논설위원


[ 양준영 기자 ] ‘샵(#)메일’이란 게 있다. 온라인에서 보내고 받는 등기우편이다. 법적 효력이 있는 등기우편을 온라인에서도 구현하자는 취지로 정부가 2012년 시작했다. 개발하는 데 80억원 넘게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일반 이메일과 호환되지 않고, 다른 메시징 서비스보다 불편해 소비자들이 외면했다. 공공기관조차 사용을 꺼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서울시의 역점사업인 간편결제 시스템 ‘제로페이’도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비슷한 처지다. 자영업자의 신용카드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도입됐지만, 사용이 불편하고 혜택이 적어 소비자가 외면하고 있다. 1분기 은행권의 제로페이 결제 건수는 6만1790건, 결제액은 13억6058만원에 그쳤다. 신용카드와 다른 간편결제에 비해 극히 저조하다. 그런데도 서울시와 정부는 올해 제로페이 홍보에 수십억원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기업 투자에 숟가락 얹는 정부

샵메일과 제로페이 모두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민간과 경쟁했다가 시장으로부터 외면당한 사례다. 정책 취지만 좋으면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을 것이란 생각은 그야말로 탁상공론이다. 하물며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산업정책이 시장과 동떨어져선 곤란하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등 지난 정부의 경제·산업정책은 구호만 요란했지 기업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고, 가시적인 성과도 별로 없었다.

문재인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한 혁신성장을 내세웠지만 ‘소득주도 성장’과 ‘공정경제’에 밀려 뒷전이었다. “산업정책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내놓은 게 3대 중점 육성 산업정책이다. 차세대 주력 산업으로 시스템 반도체, 미래형 자동차, 바이오헬스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주요 산업들이다.

정부가 운을 떼자 기업들은 투자로 화답했다. 문 대통령이 기업을 방문해 격려하고, 정부 비전을 발표하는 그림이 뒤를 이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연구개발(R&D) 및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원을, 셀트리온그룹은 2030년까지 바이오산업에 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은 ‘2030년 비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정부의 미래를 내다본 신묘한 정책에 탄복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정부는 기업의 투자 행보에 숟가락을 얹으며 생색을 내고 있다. 정부의 업적으로 남기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계획보다 활력 높일 정책 중요

“정부가 큰 방향을 제시하고, 시장이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 관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과거에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와 산업정책으로 발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 구조가 복잡·고도화하고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정부 주도 정책만으론 한계가 있다. 정부가 신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주는 시장 주도 정책이 필요하다. ‘제조업 르네상스’와 같은 미래 청사진과 목표를 제시하기보다 기업이 직면한 위기와 어려움을 해소할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는 게 중요하다.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시점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면서 수출 기업은 좌불안석이다. 한·일 관계 악화로 일본에 진출한 기업들은 사업에 악영향을 받고 있다. 승차공유, 원격의료 등 혁신성장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강성 노조의 불법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정부를 보면서 기업인들은 의욕을 잃고 있다.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고민할 때다.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