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못지 않은 반도체 장비 시장
대기업 눈치에 해외 진출 엄두 못 내
글로벌 장비 업체 탄생 기회 줘야
<전문>
글로벌 전자업체인 A사가 중국 주하이에 새로 짓는 최신 시스템반도체 공장의 승패를 한국인 손에 맡겼다. 공장의 장비 선정과 라인 구성부터 제조공장 운영까지 한국 컨설팅사에 맡긴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오랜 기간 경험을 인정 받은 최진석 사장이 주인공이다. 장비 공급업체 선정을 위해 선전에 머물고 있는 최 사장은 지난 15일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 반도체업계의 문제점과 중국 반도체 굴기의 전후 사정을 털어놨다. 그의 말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옮긴다. 그의 일부 주장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도 밝힌다.
몇년 전부터 반도체 장비업체 사장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반도체 공장에서 납품 요청을 받으면 곧 한국반도체회사의 구매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온다. 나가서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하며 여러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헤어지려할 때쯤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요청을 한다. "중국업체 건, 진행하지 마세요." 중국 관련 반도체 장비 공급은 여기서 없던 일이 된다. 대부분의 한국 장비업체 사장들은 당장 수주를 주는 한국반도체회사에 눈치를 안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한국업체가 납품하지 않으면 중국은 공장 짓기를 그만두게 될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 한국의 경쟁 상대인 일본업체에 찾아가 필요한 장비를 조달한다. 장비 자체의 품질은 비슷하지만 가격은 비싸 자유로운 시장이었다면 한국측과 경쟁이 안됐을 업체들도 많다. 기술개발 과정을 함께하며 장비업체들의 성장을 도왔던 메모리 대기업들이 지금은 한국에서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가 나오기 힘든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장비시장 규모는 645억달러였다. 호황으로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급등하기 전인 2016년 이전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는 보통 600억~800억달러 사이였다. 규모면에서 메모리 시장자체에 뒤쳐지지 않는다. 이 시장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 유럽업체들이 장악해 왔다. 한국업체들은 글로벌 10위 안에 아무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경쟁력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글로벌 장비업체가 나올 때가 됐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분석해보니 전체 장비의 15~20%는 한국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요즘 새로 짓는 반도체 공장의 장비 구매대금이 10조원을 넘기는 것을 감안하면 공장 하나 당 1조5000억~2조원의 매출을 한국 업체들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12인치 웨이퍼 관련 장비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2006년 이후 10여년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반도체 공장을 짓는 나라였다. 장비업체들이 기술력을 축적해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피에스케이,원익IPS,주성엔지니어링, 테스, 무진전자, 제우스 등은 반도체 장비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삼성전자 등 메모리업체들도 할 말은 있다. 장비 개발 자체를 공동으로 하는 등 업체들의 성장 과정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공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장비업체들이 중국에 납품을 시작하면 노하우가 이들을 통해 새어나갈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생산은 현실이다. 지난해 1070억달러였던 세계 D램 시장에서 중국의 수입 규모는 732억달러로 전체의 68%에 달했다. 수입 대체에 사활을 걸 수 밖에 없다. 만약 한국이 같은 상황이었더라도 당연히 취했을 방향이다. 중국에서 착공을 기다리는 12인치 웨이퍼 이상 반도체 제조공장만 200건 이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금 중국에 올라타지 못하면 미래에도 한국에서 글로벌 장비업체가 나오기는 어렵다.
마침 중국 반도체 시장은 한국 장비업체의 진출에 호의적이다. D램업체인 푸젠진화에 대한 미국 업체의 장비 공급을 미국 정부가 나서 차단하면서 이를 대체할 기업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 일본에 비해 미국의 정치적 입김이 적게 작용하는 한국은 중국 정부 입장에서 안심이 된다. 한국 장비업체가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중국은 5~6년 내에 국산화를 통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전망이다.
중국 반도체 업계의 대만 카르텔도 깨지고 있다. 반도체 생산기술이 없는 중국은 대만 기술자들을 대거 고용해 반도체 공장을 지어왔다. 이 과정에서 대만 사람들은 자체 카르텔을 통해 장비를 조달했다. 한국업체가 기술력만 믿고 뛰어들어도 카르텔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소용 없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 측도 대만 카르텔을 통한 생산장비 조달이 시장가보다 높은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 회사직원들이 중국 시스템반도체 공장의 장비 세팅부터 제조 관리까지 담당하게 된 것도 한국 장비업체 입장에서는 호재다. 지금 장비를 들여놓으면 우리의 컨설팅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장비 판매 수익 등을 올릴 수 있다. 우리 직원들은 한국 장비업체뿐만 아니라 원자재, 부품업체들에도 보다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다음화에 설명하겠지만 중국에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를 뛰어넘는 업체가 탄생하는 것은 상당기간 불가능하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업체들이 늘어나면 시장에서 차지하는 한국업체들의 비중은 줄어들 수 밖에 없고 매출이나 수익성 역시 악화될 수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 입장에서는 이같은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와 원부자재/부품회사를 육성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봤듯 글로벌 장비 시장 규모만 보아도 메모리 시장과 비교해 작지 않다. 메모리 시장이 지금보다 못해지더라도 한국 전체로는 반도체 산업에서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 쇠퇴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이 취했던 전략이다.
대기업들은 반도체 장비업체와 원부자재회사들의 중국 진출을 막아서는 안된다. 쌍방 계약에 따라 독점 사용 기간이 끝난 장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해외에 판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글로벌 장비업체가 한국에서도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최진석 사장은
반도체 업계에서 10년 이상 일한 이들 중에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삼성전자가 막 메모리사업을 시작한 1984년 연구원으로 입사해 2001년 SK하이닉스로 자리를 옮겨 CTO(최고기술책임자) 등을 역임하고 2010년 회사를 나왔다. 업계에서 드물게 반도체 개발부터 제조·공정까지 전 과정을 섭렵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 번만 받아도 '임원 승진 보증수표'로 얘기되는 삼성 기술대상을 세 번 수상했다. 12인치 웨이퍼 가공기술 개발, 256메가,16메가 D램 개발의 공로를 인정 받은 결과다. SK하이닉스에서는 채권단의 자금 지원이 없는 가운데 기존 생산설비로 수율을 올리고 생산량을 늘렸다. 2006년 메모리 반도체 업계 최저 제조원가, 최고 생산량 확대 등의 기록을 내놨다. 이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07년 "어떻게 삼성전자가 하이닉스에 뒤쳐질 수 있느냐"며 반도체 경영진을 강하게 질책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반도체와 제조공정이 비슷한 솔라업계인 STX솔라, 한화큐셀 등에서 CEO로 일했다. 2015년 생산 및 공장 컨설팅업체를 세웠고, 미국 마이크론의 대만과 일본 공장의 생산성 향상을 컨설팅했다. 여기서 최 사장은 추가 설비투자 없이 20%의 생산성 향상을 이뤄내 세계 반도체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A사가 추진하는 공장을 맡긴 것은 이 같은 실적 때문이다.
선전=노경목 특파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