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재치로 상대방 제압
“‘막말정치’로 지지세력 결집에 급급한 우리 정치권, 교훈 삼아야”
정치권에서 험한 말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당 지도부와 평의원 구분 없이 상대를 향해 거칠고 원색적인 말들을 퍼붓고 있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비속어까지 동원한다. ‘옳지, 잘 걸려들었다’는 듯 더 자극적인 말로 응수한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막말 배틀(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 됐다. 나라 미래에 대한 걱정은 뒷전이다.
정치인들이 툭하면 막말과 욕설로 논란을 일으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때마다 사과와 반성을 외쳤고 막말 추방 약속이 잇따랐지만 말로만 그쳤다. 한국 정치엔 상대를 굴복시키려고만 할 뿐 설득의 기술도, 품위도, 촌철살인의 재치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 지지층을 끌어들이려는 ‘노이즈 마케팅’만 횡행한다는 지적이다. 외국 언론의 비판대로 한국 정치는 ‘스프링 없는 마차’같이 돌에 부딪칠 때마다 요란하게 삐걱거리지만 윤활유를 칠할 기술도, 의지도 없는 실정이다.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의 신속 처리 안건(패스트 트랙) 지정과 관련해 여야가 주고받은 막말 사례는 일일이 손에 꼽기 힘들 정도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은어를 사용해 논란을 일으켰고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나 원내대표가 좀 미친 것 같다”고 했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좌파 독재”라고 규정하자 이해찬 민주당 의원은 “도둑놈들한테 국회를 맡길 수 있겠나”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자 황 대표는 “진짜 독재자의 후예는 김정은 아닌가”라며 “진짜 독재자의 후예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니까 (김정은의)대변인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맞받았다. 청와대의 반박이 뒤따랐고 한국당의 ‘남로당 후예’ 발언이 나오는 등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김현아 한국당 의원은 문 대통령을 겨냥해 ‘한센병’을 언급했다가 한센병 환우들과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황 대표의 광주 5·18 기념식 참석과 관련, “거의 사이코패스 수준”이라고 했다.
과거에도 막말로 논란을 일으킨 사례는 많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1998년 당시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등신 외교(2003년 당시 이상배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의장, 노무현 정부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노가리(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의 ‘환생경제’ 연극)” 등이 있다. 2009년 천정배 당시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쥐박이’라고 했고 2012년 이종걸 민주당 최고위원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그년’이라고 지칭해 논란이 된 바 있다. 2013년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을 이르는 ‘귀태(鬼胎)’라고 했다.
정치 극단화 심해지면서 합리적 공론 기대 힘들어
자극적인 말로 상대를 공격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상대를 협력 대상이 아닌 타도 대상으로 표적 삼은 뒤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패스트 트랙 지정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과 한국당 모두 지지율이 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극단적인 정치 문화가 갈등과 증오를 증폭시켜 타협의 여지를 막아버린 것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다.
한국 정치가 갈수록 진영화되면서 상대방은 물론 중간지대에 있는 국민은 안중에 없다. 정치의 양극단화가 심화되면서 협치(協治)의 기본인 건설적인 공론의 장(場)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상대에 대한 온갖 험한 말이 횡행하는 상황에선 합리적인 논쟁이 발을 붙이기 어렵다. 논리가 없으니 내용 없는 감정적 말싸움만 반복될 뿐이다.
전문가들은 막말을 근절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막말을 해도 실질적인 불이익이 없기 때문에 사과하고 욕 한 번 먹으면 그만인 게 현실이다. 물론 국회 윤리위원회 회부라는 제도가 있지만 여야 공방으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촌철살인’의 유머로 상대를 일거에 제압하는 대화의 기술을 참고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은 풍자와 반어법 등으로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데 탁월한 것으로 유명하다.
링컨 전 대통령의 잘 알려진 한 사례다. 1858년 상원의원 선거 때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 금주 운동이 벌어지던 민감한 시기였다. 링컨의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는 과거 링컨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술을 팔았다고 폭로했다. 이에 링컨은 “더글러스가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우리 가게를 가장 많이 이용한 고객 중 한 분이었어요. 저는 가게를 그만뒀지만 더글러스는 여전히 가게를 드나들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이후 더글러스는 다른 유세장에서 다시 공격에 나섰다. 링컨에게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고 비판한 것이다. 링컨이 답했다.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만일 내가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면 이 자리에 이렇게 못생긴 얼굴을 들고 나왔겠어요”라고 맞받아쳤다. 청중은 폭소했고 더글러스는 할 말을 잃었다.
링컨·레이건의 ‘촌철살인’ 재치, 막강한 ‘소프트 파워’
레이건 전 대통령의 ‘유머 정치’는 정평이 나 있다. 인신공격성 질문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유머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했다. 1984년 73세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재선에 도전해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당시 56세)와 TV 토론 때 주고받은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예다. 먼데일은 “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레이건이 고령이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였다.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먼데일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되물었다. 레이건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라고 답했다. 시청자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토론회 승자가 누구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먼데일은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 삼으려고 했다가 보기 좋게 ‘되치기’ 당했다. 먼데일은 할 말을 잃은 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레이건이 나이를 문제 삼은 먼데일에게 얼굴을 붉히며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면 진흙탕 싸움이 됐을 것이다.
레이건의 사례는 많다. 한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받아쳤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을 사악한 제국(the Evil Empire)이라고 몰아붙였다. 당시 미국 내에서 불붙었던 이념 논쟁 당시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공격한 것도 유명하다.
1981년 정신이상자로부터 총격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 가면서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테…”라고 했다. 수술 뒤엔 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 “여보, 고개 숙이는 걸 깜빡 잊었을 뿐이야”라고 다독였다.
레이건뿐만 아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임기 중 마지막으로 가진 백악관 출입기자단과의 연례 만찬에서 “공화당 일각에서 도널드 트럼프(대선 후보)에 대해 외교정책 경험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미스 스웨덴, 미스 아르헨티나 등 숱한 세계적 지도자를 만났습니다”라고 했다. 또 “내년에는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인데 그녀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고 했다. 유머와 재치로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간접 지원한 것이다.
절제의 미는 찾기 힘들고 살벌한 전투적 용어로 가득 찬 우리 정치권 풍토와는 거리가 멀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더 거친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링컨과 레이건의 ‘촌철살인’의 재치는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다. 우리 정치권에서는 이런 멋진 ‘유머 정치’를 언제 볼 수 있을까.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