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법을 바꿔 자녀 체벌을 방지하겠다고 나섰다. ‘사랑의 매’도 처벌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포용국가 아동정책’ 중 하나다. 아동 학대가 좀체 없어지지 않고, 상당수가 부모에 의한 사건이라는 지적에 따라 정부가 근절의욕을 보인 것이다.
문명국가에서 야만적 아동 학대는 근절돼야 마땅하다. 인권은 아동뿐 아니라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두루 보호할 때 본연의 가치가 빛난다는 사실도 자명하다. 문제는 법만 만든다고, 감시행정만 강화한다고 인권이 고양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법률체계를 살벌하게 하고 정부가 공권력을 한껏 행사한다고 이상사회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정부 조사에서도 국민 77%가 ‘체벌은 필요하다’는 판에 법의 실효성도 의심된다. 이미 아동복지법에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해선 안 된다’는 금지조항이 있고, 형법도 있다.
근본 문제는 법만능주의이고, 국가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도된 인식이다. 자녀 양육·훈육은 모든 부모의 최고 관심사이며, 기본적으로 가정사다. 여성가족부가 의욕을 보였던 가족관계 호칭 변경도 마찬가지다. ‘도련님’ ‘아가씨’ 같은 호칭에 문제가 있다 해도 정부가 나서 특정 방향으로 몰아갈 일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이 바람직하고,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개인의 본원적 자유가 신장되고 사적 자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큰 정부’의 진짜 해악은 재정 확대나 공공부문 비대화가 아니라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무차별 개입이다.
‘먹방 규제’ ‘아이돌스타 외모 제한’ 논의가 나왔을 때 과도해지는 국가주의에 대한 경고와 비판이 있었는데도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실효성도 의심되는 법만 양산한다고 이상사회는 오지 않는다. 설사 그런 요구가 있다고 해도 정부가 이성으로 걸러낼 필요가 있다. 외국에서도 흔하다는 논리라면, 선진국들에선 이미 보편적인 ‘간섭 없이 기업할 권리’ 같은 자유원칙은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시민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빅 브러더’ 사회의 치명적 위험에 빠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