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숙소 찾아가 단독 면담
삼성의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
외교·안보도 보이지 않는 역할
[ 좌동욱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22일 면담했다. 이 부회장이 경영 보폭을 넓히면서 삼성의 미래 먹거리 사업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민간 외교 활동이 삼성뿐 아니라 한국의 경제외교안보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 때부터 맺은 인연
이 부회장은 이날 오후 6시30분께 부시 전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을 직접 방문해 30분가량 면담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입국한 직후 첫 외부 일정으로 이 부회장을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만남은 이 부회장이 부시 전 대통령의 방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부시 전 대통령 측에 제안해 성사됐다. 미·중 무역 분쟁과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정보기술(IT)산업 변화 등에 대한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 측은 “이 부회장의 사적인 만남”이라며 “구체적인 면담 내용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후 추도식이 열리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을 예정이다.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의 회동이 교착 상태에 놓인 북·미 대화를 풀어갈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재계에선 삼성이 반세기 넘게 쌓아온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경제에서뿐 아니라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부시 전 대통령은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첫 해외 반도체 공장을 설립한 1996년 이 부회장의 부친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텍사스 주지사가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이 부회장은 부시 전 대통령이 2015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골프 회동을 한 바 있다.
비즈니스가 외교·안보에 영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삼성, 현대차, SK와 같은 국내 간판기업들이 세계 정상권 기업으로 성장한 후 이들 기업 경영진과 세계 주요국의 오피니언 리더들 간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자국 내 일자리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글로벌 기업인들을 만나려 하는 정치인이 늘고 있다는 게 재계의 전언이다.
지난해 7월 삼성전자 인도 노이다 휴대폰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던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올 2월 문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 부회장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해외 출장 중이었던 이 부회장은 일정을 급하게 바꿔 귀국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실권자로 잘 알려진 모하메드 빈 자예드 나흐얀 왕세제와는 지난 2월에만 두 차례나 만났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후계자로 일찌감치 경영 수업을 받으면서 글로벌 인맥을 쌓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선임되면서 세계 주요 기업 경영진과 정치 지도자들을 공식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최순실 국정농단 항소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후 유럽, 캐나다, 일본, 인도, 베트남, 중국 등 전 세계 사업장을 돌며 글로벌 사업을 챙기고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주요국 언어에 모두 능통하고 사교가 몸에 배 글로벌 리더들과 쉽게 친분을 쌓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