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아닌 성(性) 담론도 허용해라"…고등학교에도 번진 페미니즘 갈등

입력 2019-05-20 17:48
수정 2019-05-20 18:16

페미니즘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 측에서 동아리 해체 통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고등학생들이 동아리 해체 반대 운동에 나섰다. 학생들은 학교 밖에서 집회를 열며 학교 교장 및 동아리 지도교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 관악구 인헌고등학교에 다니는 최모군(18)은 같은 학교 남학생 2명, 여학생 3명과 함께 ‘성평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성평화 담론은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성 평등 대신 성별의 차이를 존중하며 조화를 모색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은 매달 토론하며 ‘남성성과 여성성’, ‘가부장제도와 가분담제도’ 등에 대한 의견을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다.

하지만 지난달 한 인터넷 카페에서 이 동아리의 게시글이 올라오며 성차별 논란이 일자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0일 학교 측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학교 측은 서울시교육청에 “해당 동아리가 양성 평등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취지의 답변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리 지도교사였던 사회 과목 교사 A씨는 학생들이 지향하는 성평화 담론이 자신이 추구하는 성 평등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이달 초 지도교사를 그만됐다. 고교 자율동아리는 교육부 지침에 따라 지도교사가 없으면 운영할 수 없다. 학생들이 새로운 지도교사를 구하지 못하자 학교측은 “지도교사가 없으니 동아리를 폐쇄할 예정”이라고 학생들에게 통보했다.

이에 동아리 소속 학생들을 비롯해 한국성평화연대 회원 20여명은 지난 18일 서울 낙성대역 2번 출구 앞에서 “페미니즘 독재로 동아리가 해체됐다”며 동아리 존속을 요구했다.

학교 측은 “페미니즘이 아니어서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사회 교과에서 다루는 양성평등의 취지와 어긋난다는 취지로 교육청에 답변했다”며 “지도교사가 교과시간에 가르치는 양성평등에 부합하지 않은 동아리 활동이 이루어지면 지도교사로서도 동아리를 담당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아직 동아리 폐쇄가 결정된 건 아니지만 지도교사가 새로 나타나지 않으면 동아리 운영이 취소될 수밖에 없다는 게 학교측의 입장이다. 최군은 “이미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상한 동아리로 낙인 찍혀 지도교사로 선뜻 선생님들이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학생들의 자율 동아리가 폐쇄될 상황에 이르자 지도교사 유무에 따라 동아리 존치가 결정되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교육부 지침에 따라 자율 동아리는 지도교사 없이 운영될 수 없다. 자율 동아리 활동도 교과시간에 운영되는 정규 동아리처럼 활동 내역이 학교생활기록부에 등재된다.

양지혜 청소년페미니즘모임 위원장은 “이 동아리 주장에 동의하진 않지만 같은 규정 때문에 페미니즘 동아리도 운영 취소되는 경우가 많다”며 “교사 권위로 특정 담론이 없어지는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학교측 관계자는 “동아리 운영 취소는 지도교사를 필요로 하는 규정에 의한 것”이라며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 자체를 막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