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공무원들의 한숨

입력 2019-05-13 18:09
수정 2019-05-14 11:19
오형규 논설위원


[ 오형규 기자 ] 본래 군대용어인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김영삼 정부 때다. 뉴스 빅데이터인 ‘빅카인즈(Big Kinds)’를 검색해 보면 1993년 6월께 이 말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다. 야간에 조명탄이 터졌을 때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엎드려 꼼짝 말라’는 군대구령을 공직사회의 무사안일과 보신주의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게 엎드려 눈만 굴린다는 ‘복지안동(眼動)’, 낙지처럼 펄 속에 숨는다는 ‘낙지부동’이다.

공무원법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는 공무원들은 거센 외풍이 불면 몸부터 사린다.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다. 이런 공무원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게 정권의 실력이다. 국정은 관료조직이란 집행시스템의 도움없이 거창한 청사진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올라선 데는 공무원들의 소명의식과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2년간 공무원 조직을 다룬 솜씨는 후한 점수를 받기 어렵다. 출범 초부터 전(前) 정권, 전전(前前) 정권에서 단지 명령에 따른 실무자들까지 ‘적폐’로 탈탈 털고 휴대폰 압수수색, 발설자 조사 등으로 공직사회에 몸조심 분위기부터 조장했다. 집권세력이 “노무현 정부가 관료들에 포획돼 실패했다”는 집단정서를 공유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불편한 진실은 가끔 엉뚱한 데서 터져나온다. 최근 여당과 청와대 핵심인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정책실장이 녹음되는 줄 모르고 나눈 뒷담화가 이 정권의 공무원관(觀)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관료가 말을 안 듣는다” “(정권 출범)2주년이 아니고 4주년 같다” “자기들끼리 이상한 짓 많이 했다”….

이들의 대화내용을 접한 공직사회는 분노와 냉소가 교차한다. 만기친람하는 청와대가 정책을 내리꽂듯이 각 부처에 지시하고 결과가 나쁘면 “홍보가 부족하다” “국정철학을 이해 못한다” 등 공무원만 탓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권 핵심 인사들이 정책집행 경험이 없는 정치인·교수 출신이어서 현실성 없는 정책을 강요한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실제로 2년 전 산업통상자원부 간부들이 “탈(脫)원전은 현실성 없는 정책”이라고 직언했다가 줄줄이 옷을 벗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은 국민연금 개혁안이 언론에 먼저 보도됐다는 이유로 강도 높게 조사받았다. 총리실이 ‘공직기강을 잡는다’며 세종시 공무원의 점심시간까지 통제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정책성적표가 나빠질수록 현실주의자인 ‘늘공(직업관료)’과 이상주의자인 ‘어공(외부 출신)’ 사이의 갈등이 불거진다. 그 다음은 레임덕이다. 이솝우화에서 나그네 외투를 어떻게 벗겼는지 돌아볼 때다.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