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동 화백 "고달픈 인생­에서 사랑 빼면 뭐가 남을까"…붓을 든 행복 전도사

입력 2019-05-06 17:46
컬처人스토리
'화단의 로맨티스트' 이수동 화백

초창기에는 인물화 전념
공들여 그린 작품을 보고
어린이가 무섭다고 울자
사랑 색칠한 구상화가로 변신



[ 김경갑 기자 ] ‘화단의 로맨티스트’ 이수동 화백(60)은 작년 말 경기 일산 작업실에서 첫눈을 맞았다. 마침 작업실 귀퉁이 TV에서 가수 진성의 노래 ‘안동역에서’가 간절하게 들려왔다. 가사에 담긴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내고 싶었다. 당장 붓을 곧추세워 화면에 눈을 백설기처럼 색칠했다. 수북한 눈길을 헤치며 약속 장소로 달려가는 여인의 피말리는 마음을 살갑게 터치했다. 제목은 한 편의 시처럼 ‘안동역 가는 길’로 붙였다.

매년 전시회 때마다 ‘완판’을 이어가는 인기 작가 이 화백의 작품에는 발라드 노래처럼 말랑말랑한 매력이 담겨 있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지난 5일 개막한 회갑 기념전 ‘꽃길을 걷다’는 30여 년 동안 시적인 감수성으로 사랑의 무늬를 채색한 전업 작가의 ‘감성 덩어리’가 얼마나 알차고 풍요로운지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1, 2층 전시장을 채운 48점의 ‘감성 그림’은 문학적 상상력과 회화적 기교를 단순한 선과 선명한 색채로 융합한 근작들이다. 대구 화단의 걸출한 선배들의 구상화풍을 이어받은 이 화백은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사랑을 간결하고 동화적인 구도로 담아냈다”며 “조선시대 화가로 치면 김홍도 같은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전시회 때마다 매진 사례

1959년 대구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이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때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 오는 아들을 부모는 자랑으로 여겼다. 막내인 덕에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그리 크지 않았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미술입시학원에서 일하며 현대인의 표정 연구에 전념했다. 영국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화풍에 반해 부조리한 현실을 인물화에 녹여내려 했다. 공들여 그린 그림을 본 어린 꼬마가 무섭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자 너무 속상했다. 그는 “어린아이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그림으로 평생 먹고 살겠다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좌절감에 밤잠을 설치며 화풍을 바꿔 보기로 결심했다. 2000년 그림 주제를 세계 공통어인 ‘사랑’으로 잡았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사랑과 추억을 화면에 불러오는 ‘행복 기술자’ 역할을 자처했다. 현대인의 아름다운 향기만을 골라 화면 깊숙이 채웠다. 2006년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그림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화가에게 유례없이 사인을 요청하는 애호가들이 몰렸고, 팬클럽도 생겼다. 2007년 6월 체코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민병훈 감독의 영화 ‘포도 나무를 베어라’의 포스터를 제작해 최고의 영화 포스터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미래에셋그룹이 달력, 애경은 기업이미지 광고에 그의 작품을 사용하면서 이 화백은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작년 6월 노화랑 개인전에서는 출품작 63점이 모두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붓끝으로 ‘사랑 바이러스’ 전파

만화처럼 느껴지는 ‘이수동 표’ 그림이 갈채를 받는 이유는 뭘까.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을 내려놓고 사는 사람들에게 녹슬고 얼룩진 이야기보다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전한 게 주효했다”고 작가는 설명했다. “지금은 휴대전화나 이메일로 사랑 고백을 하지만 예전에는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사랑을 표현했어요. 10대나 20대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섦을 시각예술로 전해주고, 중장년층에게는 젊은 날의 설렘과 떨림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죠.”

이 화백은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의 에세이 《연애론》에 나오는 ‘사랑의 결정작용’을 한 편의 연극처럼 화면에 풀어낸 점도 애호가들의 눈길을 붙잡은 요인”이라고 자평했다. ‘사랑의 결정작용’은 암염굴에 나뭇가지를 던져 놓으면 작은 소금 결정이 맺히고 점점 커져 보석처럼 빛나듯 사랑도 커진다는 내용이다. “자작나무와 만개한 꽃, 보름달 등 친숙한 대상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유기적으로 연결했어요. 난해한 현대미술에 식상한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면서 사랑 없인 행복, 명예, 재산도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도 보듬었고요.”

작가는 “이번 신작들도 부대끼는 현대인들의 삶에 ‘사랑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한 시도”라며 “핑크색 계통의 ‘리빙코랄’을 주로 사용해 화사함과 싱그러움을 더했다”고 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묻어둔 사랑을 꺼내 한줌의 물감으로 색칠한 그가 작품 앞에서 던진 한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는다. “하필 사랑과 꿈, 추억, 설렘에 관심을 갖는 이유요? 고달픈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뭐가 남을까요. 사랑은 멍든 영혼을 치유하는 특효약이기 때문이죠.”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