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51) 복수심
소포클레스의 비극 《엘렉트라》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사에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파괴적 감정인 복수는 문명사회가 반드시 숙고해야 할 대상이다. 소포클레스와 함께 아테네의 위대한 비극시인으로 추앙받는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도 《엘렉트라》를 무대에 올렸다.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친모를 살해하고 아테네 법정에 선 아들 오레스테스가 정의의 여신인 동시에 자비의 여신인 아테나 여신과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용서받는 과정을 그렸다. 아이스킬로스는 아테네 문명과 법정의 위대함을 알리고 싶었다. 에우리피데스도 같은 제목의 비극을 썼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표현한다. 복수를 실현한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거의 폐인이 된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조금 다르다. 정의의 이름으로 저지른 복수가 과연 정당한지 묻는다. 엘렉트라는 정의의 깃발을 내걸고 복수를 결행하는 투사가 아니라, 복수 과정을 살펴 인간의 본질을 묻고 선과 악의 경계를 살펴보는 심리학자와 다름없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중요한 재료다.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기원전 750년께 탄생했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와 벌인 전쟁 이야기다. 일리아스는 ‘일리움(Ilium·트로이의 옛 이름)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다. 《일리아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포위한 지 9년째 되던 해, 그리스 연합군의 대장인 아가멤논과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용사 아킬레우스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한다. 이 분쟁은 여러 사건들과 얽혀 트로이 왕자 헥토르의 죽음으로 끝난다. 호메로스는 이 전쟁의 발단과 헥토르가 죽은 뒤 일어난 트로이 함락, 그리고 아킬레우스 죽음까지 기록한다.
엘렉트라 비극과 관련된 내용은 《일리아스》 이야기 맨 처음의 원정 시작 단계에 등장한다. 아가멤논은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렌이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트로이로 도망한 것에 분노하며 트로이 징벌에 나선다. 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인신 공양을 해야 했다. 아가멤논은 클리템네스트라 사이에서 난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삼았다. 《엘렉트라》 비극의 발단이다.
《오디세이아》는 그리스의 또 다른 영웅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아타카로 귀향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고향 아르고스로 돌아오는 이야기도 담겼다.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템네스트라가 마련한 붉은 카펫을 밟고 궁궐로 들어온다. 아가멤논의 사촌이자 트로이 원정 동안 통치를 맡길 정도로 신뢰한 사촌 동생 아이기스토스가 클리템네스트라와 합세해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아가멤논은 이 시점에서도 트로이에서 얻은 첩 카산드라를 데리고 올 정도로 어리석었다. 아가멤논 부하들은 클리템네스트라가 마련한 연회에서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 살육 현장에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그의 가정교사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다. 오레스테스는 8년이 지난 후 아르고스로 돌아온다. 《엘렉트라》는 이 귀환에서 시작한다. 오레스테스는 왕의 자리를 찬탈한 당숙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다음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함께 매장한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에서 누가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딸을 죽인 사람이 남편(아가멤논)이라 할지라도 그 살인자를 죽이려는 인간(클리템네스트라)의 본능을 수용했다. 그러나 아들 오레스테스가 자신을 낳아 준 생모 클리템네스트라를 ‘정의의 복수’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그런 ‘야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호메로스는 오레스테스가 클리템네스트라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끔찍한 살인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겼다.
아가멤논 귀환에 관한 비극들
호메로스의 ‘아가멤논의 귀환’은 그리스 비극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스 최초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그 주제를 갖고 《오레스테이아》, 즉 ‘오레스테스에 관한 노래’로 3부작을 만들어 기원전 458년 아테네 비극 무대에 올렸다. 1부 《아가멤논》이란 작품에서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하려는 동기를 자세히 설명한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공동체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살해했다. 개인의 명분과 국가의 명분이 부딪혀 갈등하는 모습이다.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오레스테스는 고향 아르고스로 돌아와 여동생 엘렉트라와 조우한다. 엘렉트라는 호메로스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이다. 아이스킬로스는 엘렉트라라는 신화적인 인물을 새로 발굴해 자신의 비극에 등장시켰다. 엘렉트라는 아르고스에서 일어난 일을 오빠 오레스테스에게 낱낱이 이른다. 그러나 엘렉트라는 어머니 살해에 참여하지 않는다. 3부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의 한을 품은, 분노하는 여신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다 결국 아테네의 친족살해 법정인 아레오파구스 법정에 선다. 그의 변론을 듣고 투표를 진행한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진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모델이 됐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엘렉트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인 ‘정의’를 다뤘다. 엘렉트라는 어머니의 범죄를 목격했고, 오빠 오레스테스를 복수를 실행할 사람으로 환영한다. 에우리피데스는 엘렉트라를 비극적인 가정사의 희생양으로 표현한다. 이 비극에서 클리템네스트라는 엘렉트라를 궁궐에서 내보낸다. 멀리 떨어진 시골의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부에게 시집 보낸다. 엘렉트라는 병리적으로 집착하고 성적으로 왜곡돼 있지만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순간, 오빠를 막아 나선다. 하지만 그도 결국 살인에 동참한다. 그 후 엘렉트라는 깊은 시름에 빠져 자신의 행위를 후회한다.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책한다. 예언자가 등장해 이들의 행위가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두 남매는 정의를 실행한 대가로 일생을 괴로워하며 산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도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처럼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운명에 관해 깊이 다룬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결국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폐인이 됐지만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인간으로서 저지르면 안 되는 반인륜적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동시에 자신이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도덕적이며 양심적인 이유를 찾는다. 그녀는 옳은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옳지 않은 행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포클레스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들, 특히 복수심이라는 심리학적인 고민을 섬세하게 다뤘다. 이 비극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의 여동생인 크뤼소테미스는 방관하고 침묵한다. 클리템네스트라의 폭력에 순응하고 그녀의 그늘 밑에서 연명한다. 그러나 엘렉트라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오빠가 살아서 돌아온 사실에 한없이 기뻐한다. 그리고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죽음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태고의 도시 아르고스
비극은 어느 해 뜰 무렵 미케네 아르고스 궁궐 앞에서 시작된다. 오레스테스, 그의 친구 퓔라데스 그리고 오레스테스를 어려서부터 기른 가정교사가 등장한다. 가정교사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죽일 때 오레스테스를 빼돌려 포키스라는 섬으로 피신시켰다. 그 교사는 다시 만난 오레스테스에게 감회에 젖어 말한다. “트로이 전쟁의 대장인 아가멤논의 아들이여! 이제야 도련님께서 늘 그리워하시던 것들을 몸소 보실 수 있게 됐습니다. 도련님께서 꿈에 그리던 땅, 태고의 평원 아르고스, 등에가 이나코스의 따님을 찌르던 신성한 곳입니다!”(1~5행)
‘이나코스(강)의 딸’이란 하늘의 신 제우스가 흠모했던 이오(Io)의 별칭이다. 가정교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오 신화를 언급하면서 아르고스가 간직한 비밀을 암시한다. 제우스는 헤라의 질투가 두려워 이오를 암소로 변모시켰다. 천 개의 눈을 가진 괴물 아르고스가 그녀를 지켰다.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죽이자, 등에 한 마리가 나타나 이오를 이집트로 내몰았다. 이오는 그곳에서 다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제우스의 아들 에페푸스를 낳았다. 에페푸스는 아르고스 도시의 선조인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조상이 됐다.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심으로 불타 돌아온 오레스테스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배철현 < 작가 ·고전문헌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