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한·일 외교전쟁'
한·일, 갈등 넘어 대결국면으로…G20 정상회담 불투명
日, 북핵 중재 주도권 노리나
유럽 국가들에 암암리 비방전
[ 임락근/김동욱 기자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과 직접 거래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핵 중재를 위한 주도권 싸움이 시작되는 등 한·일 간 총성 없는 ‘외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北 향한 유화 제스처
아베 총리는 2일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건 없이 김정은과 만나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고이즈미 정권 당시) 5명의 일본인 납치 피해자가 귀국한 이후 (추가로) 귀국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며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처음부터 대응해온 정치인으로서 몹시 원통하다”고 했다.
북·일 정상회담은 2002년 처음 이뤄졌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회담했다. 아베 총리는 이때 내각 관방부 장관 자격으로 동행, 김정일의 사과를 끌어내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에 대한 납치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아베 총리가 17년 만에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은 납치 문제라는 국내 정치 이슈에 더해 한국과의 외교전이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 2월 하노이 미·북 2차 정상회담 이후 북핵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을 대신해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3월엔 유엔인권이사회의 대북 비난 결의안에 동참하지 않았다. 11년간 계속했던 일을 멈춘 것이다. 지난달 각의(국무회의)에 보고한 외교청서에서도 ‘북한에 대한 압력을 최대한으로 높여나갈 것’이라는 기존 문장을 삭제했다. 북한 핵·미사일에 대해 ‘중대하고 임박한 위협’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뺐다.
악화일로 한·일 관계
일본 언론들은 아베 정부가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전략적 무시’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6월 말로 예정된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만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총리관저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면 한국과의 회담에 응할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는 이상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전략적 무시’를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대법원 판결, 일본 자위대 초계기 위협비행 및 레이더 조사 논란,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과 요구 발언 논란 등 사건들이 잇따르면서 일본 내에 한국을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양국 간 물밑 경쟁도 치열하다. 한 외교 전문가는 “일본이 국제 외교가에서 한국은 국제법을 따르지 않는 국가라는 점을 암암리에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강제징용자 문제 등 과거사를 ‘국제법적으로’ 해결했다는 게 일본의 주장이다. 지난달 12일 후쿠시마현 인근 해산물 수입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판결에서 사실상 ‘패소’한 뒤부터는 한국에 대한 공세를 더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고노 다로 외무상은 지난달 24일 국회 답변에서 “국제사법의 장에서 일본이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지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기업 보복 조치 현실화되나
전문가들은 한·일이 대결 구도로 갈 경우 양측의 피해가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1일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이 국내 지방법원에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과 후지코시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달라고 신청한 게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 정부는 압류한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은 ‘레드 라인’을 넘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1일 BS후지 방송에 출연해 “극도로 유감이며 관련 기업들과 긴밀히 연계해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대응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아소 다로 재무상은 지난 3월 국회에서 “관세(인상)에 한정하지 않고 송금이나 비자 발급을 정지하는 등 여러 보복 조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임락근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 rkl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