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에 할 말 많지만…기업인, 말을 못한다
할 말 하다 찍힐라…하소연도 못하고 '냉가슴'
親노동정책·규제에 "기업하기 정말 힘들다"
[ 장창민/백승현/도병욱 기자 ]
“지나친 친(親)노동 정책과 규제 탓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습니다. 청와대나 정부에 있는 후배들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한 중소기업 대표가 행사장에서 만난 노무현 정부 시절 A장관을 붙들고 건넨 하소연이다. A장관이 “요즘 간담회도 꽤 있던데, 왜 직접 전하지 않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괜히 입바른 말 꺼냈다가 찍히면 검찰이나 국세청에 탈탈 털리지 않겠습니까.” 국내 기업들이 맞닥뜨린 ‘현실’이다.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 사이에서 “기업하기 정말 힘들다”는 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준비 안 된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로제), 해직자의 노동조합 가입 허용 추진 등 친노동 정책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툭하면 공장을 멈춰야 하는 산업안전법 등 ‘규제 쓰나미’도 산업 현장을 뒤흔들고 있다. 정부는 기업 경영권을 옥죄는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도 밀어붙일 태세다.
정부의 ‘일방통행’에도 기업들은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정책이 균형을 잃은 것 아니냐는 불만이 크지만 속만 끓인다.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경제단체들까지 눈치만 본다.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이 2017년 노동정책에 쓴소리를 했다가 검찰 수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뒤부터다. 올 들어 최저임금 정책을 비판한 최승재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이 먼지 털리듯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기업인들은 더 얼어붙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에 나서겠느냐”는 게 기업인들의 불만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정부가 기업인들의 호소를 엄살로만 여기고 있다”며 “버티다 안 되면 공장을 닫거나 해외로 옮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고 나면 규제가 새로 생겨납니다. 노동계로 기울어진 각종 법과 제도도 경영을 힘들게 해요.”(A그룹 K사장)
“사장님이 몸담고 있는 기업은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반성부터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청와대 고위관계자)
청와대 고위관계자와 주요 그룹 대외협력 담당 임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열린 모임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가 “건의할 게 있으면 가감 없이 의견을 달라”고 하자 K사장은 쓴소리를 했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의 ‘반격’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건의 사항이 잔뜩 적힌 메모지를 든 채 순서를 기다리던 참석자들은 슬그머니 메모지를 접었다.
건의도 못하는 기업들
기업들이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각종 규제로 숨도 못 쉴 지경인데, 정부는 귀를 꽉 막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말을 꺼냈다간 공개 망신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잘못 찍히면 각종 수사·조사기관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고 근로시간 단축(주 52시간 근로제)에 따른 부작용도 현실화하고 있는데 기업들이 제대로 말을 못하는 이유다. 내년 초에는 툭하면 공장 문을 닫게 할지도 모르는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된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기업과 대주주(오너)의 경영권을 크게 제약하는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협력이익공유제를 추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최근 들어 기업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경제단체에 하소연하는 것마저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준비 안 된 근로시간 단축으로 기업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를 조사할 때 의외로 ‘아무 문제 없다’는 응답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가 없다지만 정식 조사가 끝난 뒤 구두로 ‘힘들다고 하소연했다는 사실이 정부에 알려질까 걱정돼 거짓 답변을 했다’고 말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가뜩이나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이 기업을 들여다보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누가 입바른 소리를 하겠느냐”며 “정부 관계자 또는 기자, 경제단체 인사 등 누가 물어봐도 정책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난해 말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수백억원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관련 임원의 보고를 받았지만 한동안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검찰과 경찰, 국세청, 공정위 등 이른바 4대 사정기관에 의해 한 번이라도 조사를 받지 않은 대기업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최근에는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금융감독원, 관세청 등도 기업에 대한 전방위 조사에 가세하고 있다. 사정기관 및 정부 부처가 특정 기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나올 때마다 각 기업의 대관담당자들은 서로 “무슨 이유 때문에 찍힌 것 같다”는 내용을 공유하는 실정이다.
경제단체까지 입 닫아
경제단체의 사정도 비슷하다. 정부가 기업에 부담을 주는 정책을 내놓으면 한참이 지난 뒤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는 일이 많다. 지난해 말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환경노동위)에서 통과된 뒤 대한상공회의소가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게 대표적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경영계 우려사항이 최대한 반영됐다”며 개정안을 옹호하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경영계에서는 ‘김영배 전 경총 부회장 사태’ 이후 생긴 학습효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 전 부회장은 2017년 5월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을 비판했다가 박광온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대변인, 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3단 경고’를 받았다. 김 전 부회장은 지난해 초 물러났지만 고용부와 국세청, 경찰은 차례대로 경총을 조사했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인식을 경제계 인사들에게 심어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전경련 패싱’도 경제단체의 입을 닫게 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지난달 청와대 행사에 초청받으면서 경제계에서는 ‘전경련 패싱이 끝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곧바로 “전경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장창민/백승현/도병욱 기자 cmjang@hankyung.com